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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슐리안 주먹도끼’, 패러다임 전환 이끌까
‘비아슐리안 주먹도끼’, 패러다임 전환 이끌까
  • 유용욱
  • 승인 2024.02.16 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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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 『임진-한탄강 유역 구석기 연구』 유용욱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452쪽

구석기 세계관 확장해 주는 계기 마련
고고학의 학문적 자세와 올바른 고고학

1978년 1월, 애국·반공이라는 국시(國是)에 경도돼 있던 대한민국의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에서 ‘이상한 돌’이 발견됐다. 그 돌은 그때까지 동아시아에서 거의 발견된 적이 없던 아프리카·유럽의 아슐리안(Acheulian) 주먹도끼였다. 이 주먹도끼는 미국 하버드대 교수(고고학) 모비우스가 주장해 온 인종주의적 편견, 즉 동양인들은 일찍이 현생 인류 발생 이전부터 문화적으로 뒤처졌다는 고정관념을 일축해 버리는 자료였다. 

따라서 전곡리 주먹도끼는 수십만 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서양과 동등한 수준의 물질문화를 영위했다는 역사적 자부심을 갖게 해주었다. 전곡리에서 주먹도끼가 발견된 이후 인근의 연천군과 파주시·포천시·철원군 일대에서는 유사한 주먹도끼가 다수 확인됐다. 현재는 이러한 주먹도끼 출토 지역을 ‘임진-한탄강 유역’으로 부른다. 그리고 과학적 접근법의 발달과 파급을 통해 이 지역에서 연대 측정과 정교한 분석 결과가 누적됐다. 

활발한 토론과 논쟁·비판의 결과 “아주 오래전부터 서양과 동등한 문화적·기술적 수준을 보유한 한국인 조상의 산물”이라는 종족주의적 가치를 부여받았던 임진-한탄강 유역의 구석기 공작(industry)은 “서양보다 상당히 늦게 아시아 극동 지역에서 자체 발생한 구석기 기술의 지역 변이”로 현재는 가치중립화됐다. 종족주의와 국가주의라는 구시대의 독단을 벗어던지면서 보다 객관적이고 글로벌한 수준의 연구 담론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제는 과거의 감정적·국가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 임진-한탄강 유역의 구석기를 아슐리안과는 무관한 동아시아 지역 내 독자적인 구석기 공작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데는 무려 4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현재 진행 중인 임진-한탄강 유역 구석기 연구의 담론은 바로 ‘아슐리안은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구석기가 왜 하필 극동에서 이렇게 늦게 발생했을까’라는 질문이다. 구대륙의 서반구에서 일찍이 유행하던 구석기 자료가 한참 뒤에 극동의 한반도에서 전혀 다른 맥락으로 등장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많은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은 그동안 없었던 대안을 추구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슐리안이라는 구대륙 구석기 연구의 인위적 개념은 임진-한탄강 유역 주먹도끼의 시공간적 본질과 기술적 특성을 통해 그 문제와 한계가 분명해졌다. 19세기 말에 고안된 이 개념은 지난 20세기 동안 동아시아 구석기 공작을 ‘아슐리안과 달리 주먹도끼가 없는’ 안티 테제로만 파악할 수밖에 없게 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 임진-한탄강 유역 구석기 공작은 “아슐리안과는 무관한 비아슐리안 주먹도끼를 가진다”라는 개념을 새롭게 수용할 근거를 마련했다. 이는 기존 구석기 학계의 기존 해석틀이 더 이상 온전한 설명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한계를 자각하도록 해준 패러다임 전환의 전조이다. 

브루스 트리거 전 캐나다 맥길대 교수(고고학)가 지적한 대로, 고고학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안일이라는 자기만족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진-한탄강 유역 구석기 연구』는 한국의 고고학은 물론 글로벌한 수준에서 구석기 세계관을 확장해 주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그러나 이 책이 실제로 이룩한 것은 아슐리안과 외견상 흡사하지만 시공간적으로 전혀 맥락이 다른 구석기 공작이 한반도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을 밝혀낸 것뿐이다. 덧붙여 기존의 인종주의적·국가주의적인 가치 부여를 통해 그 사실을 결코 과장하거나 왜곡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사후 확신 편향으로 보면, 지난 45여 년간의 임진-한탄강 유역 구석기 연구 성과는 정말 보잘것없는 자명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렇게 보잘것없는 성과를 통해 지금까지 반복해 온 유사과학적인 접근법과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의 반작용으로 부여된 과도한 주관적 의미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필자가 의도한 바, 객관적인 연구 담론에 매진하는 제대로 된 학문으로서의 고고학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을 온전한 후속 연구와 파생 연구를 더욱 기대하도록 만드는 촉진제로 받아들일 때 그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유용욱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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