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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자본주의의 욕망 안에서 ‘실학’은 어떤 의미인가
한국형 자본주의의 욕망 안에서 ‘실학’은 어떤 의미인가
  • 김재호
  • 승인 2023.11.20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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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연구의 새 국면’ 과 21세기 실학
서구식 과학연구 학계서 실학의 의미 찾기

다산연구소의 ‘신아구방 실사구시 연속 학술집담회’는 3일 동안 펼쳐졌다. 신아구방(新我舊邦)은 “낡은 우리의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는 뜻으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개혁 정신을 대표하는 말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실제 사실로부터 진리를 추구하자”라는 뜻으로 조선 후기 실학의 실용 정신을 상징한다. 

1일차 ‘실학 연구의 새 국면’은 과거의 실학 연구를 성찰하고 새로운 실학 담론을 제안했다. 2일차 ‘21세기 신(新)실학, 인공지능과 경기실학’은 산업과 노동·생활 환경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과학기술에 대해 개혁과 실용의 관점에서 접근해 봤다. 3일차 ‘기회의 경기실학, 신아구방 실사구시’는 시민들을 초대해 직접 그 목소리를 듣고 실학 전문가와 지방의회 의원·행정 담당자들이 실학적으로 소통했다. 사회를 맡은 김진균 다산연구소 연구실장은 “개혁과 실용의 정신으로 당시의 백성들을 구제하려는 실학의 근본 정신을 잊은 대학 학문에 대한 도전의 의미로 이번 학술집담회를 준비했다”라고 취지를 밝혔다.

첫날 이은영 성균관대 강사(한문학과)는 「영재 이건창의 사상과 실학적 행보」를 발표했다. 19세기 선도 학문이 정약용의 실학이라면, 20세기 선도 학문은 정인보의 국학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학문은 신실학에 해당된다. 이 강사는 “실학은 20세기에 선도 학문의 자리를 내어준 학문인가?”라고 질문하며, “그 해답을 영재 이건창의 양명학을 통한 실학적 행보에서 찾아보자”라고 제안했다. 영재 이건창(1852∼1898)은 조선 500년 최연소 문과 급제자로서 암행어사를 지냈다. 

지난 13일부터 사흘간 경기문화재단 인계동사옥에서 다산연구소 주최로 ‘신아구방 실사구시 연속 학술집담회’가 열렸다. 이날 집담회를 통해 실학에 대한 새 국면을 논의하고, 앞으로 연구방향에 대해 토론했다. 사진=다산연구소

 

외면의 명분 아닌 내면의 실을 강조

양명학은 외면의 명(名)이 아닌, 내면의 실(實)을 강조하며, 자아각성을 요구한다. 이 강사는 “남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은 양명학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치적 면에서 이건창은 한시 「광주적(廣州糴)」을 통해 지방 관리의 폐단을 폭로했다. 이건창은 “쌀을 내줄 때는 흙과 모래까지 섞더니 / 쌀을 거둘 때는 정밀하게 체까지 사용하고 / 거둘 때는 다급하게 명령을 내리더니 / 내줄 때는 자꾸만 기일을 미룬다네”라고 적었다. 

이건창은 두 번째 유배지인 보성에서 잘못돼 가는 나라를 바로잡을 해결책을 담아 『의논시정소(擬論時政疏)』를 집필했다. “변경(개혁)이라는 것은 그 실을 변경하는 것이지, 그 이름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강사는 “임금에게 부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實)’을 앞세우고, ‘실’의 손님에 불과한 ‘명(名)’을 뒤로 할 것을 청했다”라며 “우리가 부유하지 못하고 강대하지 못한 모든 원인은 외부의 다른 나라가 아닌, 우리 조선에서 찾을 것을 강조했다”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 강사는 “영재 이건창은 자주적 개항과는 별도로 부국강병의 실익에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고, 유구한 역사를 지켜온 단발과 복식 제도 등의 전통을 말살하는 외면만의 개화정책을 비판하는 자세를 고수했다”라고 밝혔다. 양명학을 국학으로 발전시킨 정인보의 스승이 이건창의 동생인 이건방과 이건승이었다. 이건창의 양명학을 기저로 한 실학적 면모는 정인보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21세기 실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이 강사는 “19세기 정약용의 실학을 21세기까지 이어 오기 위해서는 실학 안에 양명학에서 발전한 정인보의 국학을 완전히 포용해야 한다”라며 “그래야 19세기 정약용의 실학 정신은 21세기에 더욱 발전된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라고 제언했다. “실학은 부국강병에 실익 되는 학문의 실천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모든 근원에 일반 ‘민(民)’이 기저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아울러, 이용후생·경세치용·실사구시에 더해 그는 “이건창에게서 드러나는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이국편민(利國便民)과 실학에 인문학을 포함시킨 실심실학(實心實學)을 함께 아울러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날 학술집담회를 통해 "아무런 지표 없이 연구 성과만 누적하는 현재 학계의 타성에 대한 비판으로 다시 실학의 운동성을 찾아본 것"이 큰 성과였다. 사진=다산연구소

 

‘언사소’와 9가지 개혁 방안 시무책

정은주 영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원은 「매천 황현의 현실 인식과 실학의 친연성」을 발표했다. 황희 정승의 후손인 매천 황현(1855∼1910)은 나랏일에 대한 상소인 「언사소(言事疏)」를 통해 9가지 개혁 방안 시무책을 제시했다. △언로(言路)를 열어 나라의 명맥을 소통시키는 일 △법령을 신뢰할 수 있게 해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 △형벌을 엄격하게 적용해 법의 기강을 진작시키는 일 △절검(節儉)을 숭상해 재원을 넉넉하게 하는 일 △외척을 내침으로써 공분을 풀어주는 일 △인재 보증의 천거 제도를 엄격하게 해 능력과 덕을 갖춘 인재를 등용하는 일 △관직 재임 기간을 길게 해 다스림의 성과를 책임 지우는 일 △군제를 바꾸어 화란(禍亂)의 싹을 없애는 일 △토지대장을 조사해 나라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는 일 등이다. 

정 연구원은 “황현은 전통 유학을 공부했으나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자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양명학과 실학에 관심을 두었다”라며 “실학에 영향을 받은 개화파(신정희, 강위)·양명학파(이건창, 김택영) 인물과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날 집담회에서 “조선 후기를 넘어 근대로 연결되는 실학을 살펴봤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라며 “독립운동가 황현을 넘어 실학의 측면에서 그를 살펴봤다”라고 말했다. 황현은 실학 관련 저술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가 지표로 삼은 정신과 교우 관계 등에서 실학의 면모가 두드러진다는 뜻이다.

 

황희 정승의 후손인 매천 황현(1855∼1910)의 초상화이다. 그림=위키백과

 

정인보의 학술적 독립운동인 조선학·실학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사상사)는 「백암 박은식과 근대 실학」에서 보수적인 학자를 비판하는 내용을 소개했다. “한국의 선비가 의리를 빈말로 하고 실로 경제에 어두워 각국 이용후생의 신학과 신법을 원수처럼 보고 물리쳐 마침내 전국 인민을 부지불식 속에 가두고 금일에 이르러 전국 동포가 장차 남의 노예가 되기에 이르니 이는 누구의 죄인가?”(『학규신론』)

김윤경 한국전통문화대 한국철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위당 정인보의 실학과 ‘실학’」 발표를 통해 “양명학 차원에서 실심(진심)을 실행하는 학문이 곧 실학”이라고 강조했다. 연희전문대(현재 연세대) 교수였던 담원 정인보(1893∼1950)의 학술적 독립운동이 바로 조선학·실학이었다. 정인보는 학문으로만 끝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도덕성을 추구했다. 이러한 실천적·성찰적 태도는 양명학적 전통에서 나온다. 김 연구교수는 “양지·양심 등 양명학의 핵심 개념이 굉장한 도덕주의를 요구한다”라고 말했다. 

토론에서 백민정 가톨릭대 교수(철학과)는 “박은식·정인보 등이 활동했던 19세기 말∼20세기 초가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라며 “서세동점 때 선배 학자들의 고민을 통해 나를 보아야 현재의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다”라고 반성했다. 한국형 자본주의의 욕망 안에서 과연 다산을 연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반문한 것이다. 

특히 학계는 인공지능·빅데이터 등 여전히 서구식 과학기술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다. “과학을 배워야 하지만 무한 경쟁과 공리주의만 주창해선 안 된다. 이용후생보다는 도덕성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백 교수는 “일본과 서구의 침략을 보면서 평화를 언급하던 선배 학자들이 있었다”라며 “현재 나의 문제의식을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하기 위해 실학을 호명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김 연구실장은 “1970년대의 시대정신으로 실학 연구의 근간을 이루었던 민족주의와 근대주의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아무런 지표 없이 연구 성과만 누적하는 현재 학계의 타성에 대한 비판으로 다시 실학의 운동성을 찾아본 것이 오늘 학술집담회의 큰 성과”라고 말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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