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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연구개발 예산과 관료주의
국가연구개발 예산과 관료주의
  • 이덕환
  • 승인 2023.09.04 08: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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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_ 이덕환 편집인 /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이덕환 편집인

31조1천억 원의 국가연구개발 예산에 안주하던 과학기술계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국가연구개발비를 나눠 먹고, 갈라 먹는 ‘약탈적 이권 카르텔’이라는 汚名을 속절없이 뒤집어쓰게 돼버렸다. 당장 내년도 국가연구개발 예산이 5조2천억 원(16.6%)이나 삭감된다. 실질적으로 1957년 이후 처음 겪는 일이다.

특히 대학의 풀뿌리 기초연구에 투입되는 예산이 2조4천억 원(6.2%)이나 깎이고, 국가 주도의 기술 개발에 투입되는 출연연구원의 예산도 2조1천억 원(10.8%)이 줄어든다. 카르텔은 핑계였을 뿐이라는 뜻이다.

지난 6월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대통령의 느닷없는 ‘예산 전면 재검토’ 지시가 나오기까지 이상징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대통령의 과학기술에 관한 관심이 지나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정도였다. 국무회의에서 반도체 특강도 들었고, 해외 순방에서도 과학기술 관련 일정을 절대 빼놓지 않았다.

심지어 대학의 개혁에서도 과학기술 분야의 인력양성을 강조해왔다. 수도권 정원 규제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에 첨단융합학부를 신설하고, 수도권 대학의 입학정원을 큰 폭으로 증원해준 것도 첨단 기술에 대한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 덕분이었다.

대통령의 카르텔 발언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다만 지난 정부에서 갑자기 늘어난 소재·부품·장비와 감염병 관련 긴급 예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긴급 예산 투입이 일본의 갑작스러운 반도체 소재 수출 금지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회성 조처였다는 사실은 천하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절박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편성된 10조 원에 가까운 추가 예산 집행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런 사실이 대통령에게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어 보고됐을 수는 있다. 

그러나 긴급 예산의 투입으로 국가적 위기를 비교적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었다는 당시의 평가도 무작정 무시할 수는 없다. 이미 끝나버린 한시적 예산 투입에서 확인된 문제를 내년도 예산의 전면 재검토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쨌든 24조9천억 원에 이르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주요 연구개발 예산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단계에서 불거진 이례적인 해프닝과 그 이후 2달 만에 졸속으로 끝나버린 예산 재검토의 과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카르텔 발언에서 예산 삭감에 이르는 과정이 국가연구개발 예산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 보기 드문 사례였기 때문이다.

주요 연구개발 예산을 편성하는 과기부에 대한 관료 사회의 인식이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지난 20년 동안 과학기술 거버넌스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던 결과다. 지난 정부에서 부활시킨 혁신본부도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대통령의 카르텔 발언은 예산 편성을 주도하고 있는 과기부에 대한 관료 사회의 거부감 때문에 불거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다.

세금으로 지원해주는 국가연구개발 예산에서 연구자의 ‘자율’은 환상이다. 예산의 철저한 ‘관리’는 관료의 가장 무거운 책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연구비를 지원해주되, 간섭은 하지 말아 달라는 인문학계의 요구는 그런 현실을 무시한 억지일 수밖에 없다. 필즈 메달을 받은 허준이 교수도 관료주의적 관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업의 지원을 받았던 것이다.

이덕환 편집인
서강대 명예교수 /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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