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희 / 편집기획위원, 평택대 국문학과 교수 © |
지방 전문대학의 염색과 교수 조은숙과 만화과 교수 박석규. 이들은 중학교 때 최고의 양아치, 양아치의 ‘깔대기’였던 과거를 자신의 비밀로 묻어두고 있다 우연히 대학에서 교수로 만나게 된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갖은 교양과 품위 있는 말투로 자신을 치장하고 숨기며 살던 가면이 순식간에 벗겨지는 순간이다.
조은숙(문소리 분)은 스스로의 품위와 지적 풍모에 취하여 높은 비음으로 자작시를 낭송한다. 함께 회식을 하던 남자교수들은 거의 실신할 듯이 감탄을 하며 여교수를 바라본다. 여교수는 광택나고 몸에 붙는 브라우스와 스커트를 입고 있다. 남성들의 숱한 관능적 시선을 스스로 즐기면서 자기도취적으로 몸을 꼬며 걸어간다. 여교수는 자신의 관능미를 마음껏 펼치며 지적 내숭으로 남성을 유혹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완벽한 코메디다.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지식인들의 내숭과 위선을 포복절도하며 비웃어보라 한다.
아무렴, 세상에 이런 여교수는 없다. 실제 대학현장에서 대개 여교수는 중성적이어서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야 한다(여성은 중성화내지 남성화됨으로써 비로소 남성중심 사회에 끼어들 수 있으므로). 여성 학자는 중성적일 때 좀더 지적인 풍모와 안정감을 보장받는다. 사실 여성 학자에게서 아름다움 특히 관능적 미모란 그들의 지성의 수준을 의심하게 하는 잣대일 뿐이다. (“어떻게 저렇게 화장을 하고 스커트를 입고 공부란 것을 할 수 있겠어? 말도 안돼!”) 그렇다. 여교수는 쇼트커트나 단발머리에 거의 원불교 전도사나 수도승처럼 검정, 회색, 곤색 슈트를 번갈아 입고 검정색 단화를 신어야 한다. 만약 영화에 나오는 여교수와 같은 여성 학자가 있다면 그들은 남성 교수에게서 ‘애인’의 그룹에 속하게 되지 ‘동료’의 반열에 놓이지 않는다.
그래, 교수들은 얼마나 불쌍한가. 용감하게 맞장 뜨고 서로 통쾌하게 웃어버릴 담대한 호기조차도 없다.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숨긴 채 내숭을 떨고 체면을 차리면서 “적어도 공인이니까” 자위하면서. 제도권 하에서, 당위적 삶의 표본 아래서, 점잖은 목소리와 성숙한 교양으로 욕망을 저당 잡힌 채. 서로를 “선생님, 선생님”이라 부르면서, 지성인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우리는 어떤 비밀과 공모를 안전하게 숨기고 있는 것인가.
하여 영화에서 대학 교수는 말한다. “교수생활? 편하거든, 아무렴...... 교수야 입으로 먹고 사는 거지. 그래도, 겁도 나지, 얘들한테 구라쳐서..... 그렇다고, 함부로 못하지. 얘들이 보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빨간 마후라’의 날라리 같은 끼를 반납한 채 어느 정도 내숭을 떨면서 시대의 지성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러시아에 가서 한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아오고 양아치였던 과거를 숨긴 채. 그러니 영화<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우리 시대 교수 상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블랙유머가 아니고 무엇인가. 흥미로운 陰畵가 아니고 무엇인가.
교수신문이 교수를 비하하는 이러한 글을 싣는 의도가 뭔지 알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