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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평가기준이 없는 나라
문화비평: 평가기준이 없는 나라
  • 권성우 숙명여대
  • 승인 2006.03.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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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우 숙명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
방금 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일본전이 끝났다. 마무리 투수 오승환이 일본의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잡자, 함께 TV를 시청하던 우리들은 감격에 겨워 서로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이렇게 행복하고 기뻤던 적이 얼마나 오래간만이었던가. 이론적으로야 최근의 탈민족주의적 입장에 일정하게 경청할 대목도 있다고 생각하던 터였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은 투철한 민족주의자가 되어버린 나 자신을 발견한다.

한국 야구가 세계최강 미국과 아시아의 맹주 일본을 연파하고 WBC 참가국 중에서 유일하게 전승으로, 단 한 개의 에러도 없이 4강에 선착한 사실은 우리나라 야구 환경과 인프라를 생각하면 사실 기적과 같은 일이다. 야구의 메카인 미국은 차치하더라도 일본의 경우 고교야구팀이 약 3천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고교야구팀은 고작 50팀 남짓이다. 어떻게 이러한 엄청난 인프라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적적인 연승행진이 가능할까. 사실 야구뿐만이 아니다. 월드컵 4강의 감격을 우리는 기억한다. 축구와 야구에서 모두 세계 4강에 오른 나라는 한국이 세계 최초라고 한다. 그뿐인가. 토리노 올림픽에서 우리나라에 6개의 금메달을 선사한 쇼트트랙, 거기에다가 펜싱, 체조, 주니어피겨 등등 경쟁국들에 비해 엄청나게 열악한 시설과 선수층,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수준에 오른 한국 선수들의 경쟁력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전통적이면서 상투적인 해석법에 따르자면, 한국인 특유의 끈기와 열정, 애국심, 단결심을 거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만으로 한국 스포츠의 남다른 경쟁력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상 ‘한국인 특유’ 운운하는 발상이야말로 때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비과학적인 국수주의의 소산일 수 있다.

내 생각에 이러한 한국 스포츠의 쾌거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경쟁사회 한국의 단면을 우울하게 투사하고 있다고 본다. 홍콩과 싱가포르 같은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사실상 인구밀도 1위의 국가인 한국의 원천적인 환경은 사회 각 부문에서 극심한 무한경쟁의 구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어떤 나라 선수에게 스포츠는 취미나 오락일 수 있지만, 이 땅의 선수들에게 스포츠는 처절한 생존의 수단이자 무한 경쟁이 난무하는 정글이다. 그 결과 우리 선수 대부분은 올림픽에서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따도 흔쾌하게 미소 짓지 못하는 1등 지상주의에 심각할 정도로 중독되어 있다. 그에 따라 경쟁에서 뒤떨어진 선수들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나 배려는 전무하다시피하다. WBC 4강이라는 쾌거 뒤에는 바로 이러한 한국사회와 한국 스포츠의 병리학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학계는 어떠한가. 어느 나라보다도 대학교수직에 대한 경쟁이 높다는 점, 그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지원은 너무나 부족하다는 점 등에서 스포츠계와 흡사하다. 다만 차이를 들 수 있다면 스포츠의 경우 그 엄청난 경쟁에서 승자를 판정하는 근거는 객관적인 실력이나 수치(가령 야구의 경우 방어율이나 타율)이지만, 학계의 경우 때로 그 기준마저 모호하다는 점이다. 물론 스포츠계에도 이른바 학벌이나 패거리문화의 폐해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학계에 비하면 대단히 양호한 수준이 아닐까. 실력이 객관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분야이므로. 그래서 스포츠계는 실력 있는 젊은 선수들이 수시로 힘이 떨어진 노장들을 대체하지만, 학계는 단지 먼저 강단에 진출했다는 이유로 영원히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학자들이 많다는 점도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학문에 대한 실력과 열정을 갖춘 젊은 학자들과 학문후속세대들 상당수가 절망할 수밖에 없는 학계의 현실은 어떤 면에서는 스포츠계보다 한층 참담하고 우울하다. 한국사회가 어차피 모든 영역에서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경쟁의 공정성, 객관성만이라도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 열정과 실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학강단에 진출하지 못한 많은 학문후속세대의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권성우 / 숙명여대·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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