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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번역비평 기사에 대한 반론
어느 번역비평 기사에 대한 반론
  • 이진우 계명대
  • 승인 2006.02.07 00:00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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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반역인가?

▲이진우 교수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이처럼 간단명료하고 잔혹한 평가는 없을 것이다. 글이든 대화이든 무엇을 말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면,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파악의 어려움은 그 주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고, 글을 읽고 듣는 사람이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비평은 그것이 아무리 생산적이고 호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글을 쓰는 사람에겐 정말 감내하기 힘든 혹평임에 틀림없다.

 이 말은 종종 비평자의 권력의지를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는 진리를 논하는 학계에서도 이 말을 얼마나 자주 듣고 말하는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충돌하는 곳에서 어김없이 들리고, 자신의 영역을 조금이라도 벗어난 이론과 담론을 들을 때면 서슴없이 사용하는 말, 그것이 바로 이 간단한 한마디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이 말에는 종종, 설령 제압의 심리학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해의 거부’가 묻어 나온다.

 최근 내 자신이 이런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그 시발점은 <니체전집 2: 비극의 탄생>에 대한 박찬국 서울대 교수의 비평이었다. 그는 첫 문장의 번역이 번역문 전체의 수준과 성격을 가늠케 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비극의 탄생>의 첫 문장을 박준택 역 그리고 김대경 역과 비교하면서 이렇게 간단히 평가한다. “이 번역은 아무리 읽어도 그 의미가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다.” 첫 문장에 대한 나의 번역문이 다른 두 번역보다 명료하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부인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번역과정에서 다른 번역본을 참조하였던 내가 왜 이렇게 번역하였을까. 번역할 때마다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이 부분에서 많은 고민을 하였던 것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의역을 해야 할까. 아니면 원전에 충실하게 직역을 해야 할까. 이 문장은 8행이나 되는 긴 가설법 문장이다. “예술의 발전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논리적 통찰에... 이른 상태라면, 우리는 미학을 위한 큰 소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자는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는 직설법의 번역문장을 선호한다. 나는 니체처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경우에는 원문에 충실한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원전에 충실하고 동시에 자연스럽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비판은 이중적이다. 생산적이고 동시에 파괴적이다. 첫 문장에 대한 박찬국 교수의 비평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도 부당하게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부분을 전체로 일반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가 정말 나의 번역 전체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번역문을 원전에 대한 충실설과 가독성의 두 가지 척도로 평가한다. 원전에 충실하다보면 가독성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김대경 역이 몇몇 오역에도 불구하고 “원전에 대한 충실성과 가독성 면에서 가장 낫다”고 판단함으로써 나의 번역이 마치 원전에도 충실하지 않은 것처럼 교묘하게 말하고 있다. 오역과 원전에 충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지적해야 마땅할 것이다.

 전체의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부분을 마치 전체인 것처럼 만든다면, 그것은 왜곡의 폭력이다. 교수신문은 박찬국 서울대 교수의 비평문에 “이진우 譯 의미파악 어려워”라는 표제어를 붙였다. 이렇게 뒤틀린 왜곡은 출판저널 2월호에 게재된 번역비평에 관한 기사에서 다시 한번 이루어졌다. 강대진의 “니체전집 완간의 기쁨과 몇 가지 아쉬움”이라는 글은 번역비평이 어떠해야하는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글쓰기이다. 그는 그리스 비극에 관한 니체의 글을 올바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고전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한다. 맞는 말이다. 그는 몇몇 군데 잘못 표기된 인명을 예리하게 집어낼 뿐만 아니라 그가 “더 좋은 번역, 더 나은 책 꾸밈새를 위해” 제안하고 있는 지적들은 실제로 주석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는 니체가 다루고 인용하는 그리스 고전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그의 글과 사상이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번역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당시에 고전 문헌학자들을 경악시켰던 그의 글들을 문헌학의 기준에 맞춰 번역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예를 들어 그는 “durch Wasserkur abgemergelt”를 “물 치료법으로 쇠진하게 만들고” 대신에 “설사제를 먹여 체중을 줄이고”로 풀이한다. 이와 관련된 아리스토파네스 <개구리>의 구절은 이렇다. “‘흰 무우’로 그것의 체중부터 줄이고 나서, 책에서 짜낸 잡담의 액즙을 주었지요.” 이 희극의 전체맥락을 알지 못한다면, 이 문장 자체의 뜻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흰 무우”가 당시 설사제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뜻이 명확한 “Wasserkur”를 “흰 무우” 또는 “설사제”로 번역해야 할까. 당시의 문헌학자들이 평한 것처럼 몽상적이고, 과장되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심한 그의 문체를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아무튼, 번역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손질할” 수 있도록 지적해준 데 대해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교수신문은 이 비평에 대한 기사에서 비평자의 선의를 악의로 왜곡시킨다. 교수신문은 여기서 비평의 전체적 맥락을 무시한 채 나의 번역을 “문제번역”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매우 선정적인 표제어을 사용한다. “이진우 교수 번역,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처럼 분명한 말로 교수신문이 두 번씩이나 한 인격을 짓밟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비평에는 호의적 비평도 있고 악의적 비평도 있다. 이들의 비평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직역의 문제점을 조금 더 치열하게 고민하라는 주문일 것이다. 번역을 하면 할수록 번역이 어려워진다. 원문이 어려워도 번역은 쉬워야 되는가. 원문이 만연체라도 번역은 간결체여야 하는가. 난해한 하이데거를 이해하기 쉬운 야스퍼스로 만들고, 하버마스를 호르크하이머로 만들어야 하는가. 니체가 말한 것처럼 번역에는 뜻도 중요하지만 리듬, 호흡, 문체도 중요한 것인가. 간단히 말해, 번역은 반역인가? 교수신문의 기사가 아무리 부당하고 잔혹할지라도 이런 문제점을 일깨워준 데 대해 감사할 뿐이다.

이진우 / 계명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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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2006-04-11 18:04:31
이진우 선생의 번역은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고, 거기에 충실하게 작업을 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모국어 구사에 있어서 좀 부족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어만큼 다양한 층위의 표현을 구사할 수 있는 언어도 드뭅니다. 이런 논의들로 인해 번역서적들의 질이 더 높아지길 기대합니다.

지나다 2006-03-29 02:21:43
여러 책을 보건대, 이진우 선생은 번역을 좀 그만하셨으면 하는 바람이 차고 넘칩니다.
심지어 접속법을 단순과거로 마구 번역한 것도 있고.. 참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이제 자재하시길 빕니다.

김현경 2006-02-09 01:36:20
이진우 번역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원전과 대조해본 적은 없지만 감명 깊게 읽었는데, 정말 명쾌하게 머리에 잘 들어오던데, 쓰레기라는 말을 읽고 놀랐다. 어느 부분에 오역이 있었는지 지적해주시면 독일어를 못하는 독자들로서 대단히 고맙겠다.

나무 2006-02-08 18:01:58
아래에 기사를 읽으니 이진우가 또 하버마스 책과 아렌트 책을 번역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누가 좀 말려주었으면. 가끔은 사람에 따라 부지런함이 미덕이 아닌 경우가 있다.

나무 2006-02-08 17:53:19
나는 여기서 니체 책이 아니라 이진우가 번역한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을 주로 염두에 두고 의견을 밝혀보겠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진우 번역은 쓰레기는 아니다. 그러나 좋은 번역을 결코 아니다. 개선해야 할 점과 아쉬움이 아주 많은 번역이다.

이진우는 여기서 자신에게 제시된 비판을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비껴가고 있다. 하나는 자신을 직역을 주로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문이 원래 어려운데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직역에도 두 종류가 있다. 원문을 충분히 이해하고 의역할 수도 있지만 직역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하는 직역이 하나다.
다른 하나는 직역할 수밖에 없어 직역하는 것이다. 번역해 나가는데,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이 있다. 어떻할까? 그 문장이 문법적으로도 독해가 안 되면 아마 그 문장을 못 본 체하고 넘어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는 못했지만 그래도 문법적으로는 어떻게 풀어볼 수 있을 것 같다면, 이때는 의미는 모르면서 기계적으로 직역을 하게 된다. 원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든 한국어 실력이 부족했든 나는 이진우의 직역을, 직역을 할 수밖에 없어서 한 직역이라고 본다.

원문이 어려운데 어떻하냐는 하소연도 그렇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이진우의 번역보다 (영어나 독어를 썩 잘 하지도 못하는데도) 영어번역이나 혹은 사전찾아가며 독어 원문을 읽는 것이 더 이해가 잘 된다면? 이것도 단순히 원문이 어렵다는 것으로 변명이 되나?

이진우의 번역에 대해서는 대학원생을 시킨 것 같네, 가까운 사람이 대신 한 것 같네 하면서 말이 많다. 그러나 자기 이름으로 냈으면 자신이 책임을 져야지, 나중에 가서 그런 식으로 변명하지 말길 바란다.

충분히 들을 수 있는 비판을 듣고, 이진우는 자신의 인격을 두번씩 죽인다며 호들갑을 떤다. 그렇게 번역의 질을 자신의 인격과 결부시키는 사람의 번역이 하나 같이 왜 그렇게 부실한가. 번역은 많이 했다. 니체, 하버마스 두 권, 맥킨타이어, 한나 아렌트, 한스 요아스의 책들. 왜 그 많은 책 중에 모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소리만 듣지, 혹은 누구 시켜서 대신 번역시켰다는 의심만 일으키지, 정말 좋은 번역이라는 소릴 듣는 책은 왜 단 하나도 없는가? 그에 대해서 번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박순영인가가 한번 "덕의 상실"에 대해 좋은 번역이라고 한 적이 있다. 과연 번역을 읽어보고 쓴 글인지 의심이 들더군.)

한국 같이 좁은 출판시장에서 나쁜 번역이라도 먼저 나오면 새로운 번역이 나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요즘은 저작권 때문에 더욱 그렇다. 능력도 성의도 없으면서 선점하겠다는 식으로, 석사과정 학생들이 자기들 공부를 위해서나 했을 수준의 번역을 함부로 출판하는 것은 학문발전에 장애가 된다. 더구나 이진우는 이미 전임 교수이고 생계가 어려운 사람도 아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