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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블랙코미디를 위한 미학적 훈련
문화비평: 블랙코미디를 위한 미학적 훈련
  • 김진석 인하대
  • 승인 2005.03.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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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때 그 사람들’을 둘러싼 싸움은 정치적인 기준으로만 보면 다시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일어난 듯했다. 영화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거나 명예훼손 차원의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이 한쪽에 있고, 박정희정권의 타락을 고발하는 사람들이 다른 쪽에 있는 듯하다. 굳이 말하자면 나도 후자에 가깝지만, 사실 이 대립은 허구적이다. 우선 그 영화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보수도 아니고 기껏해야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수구에 가깝겠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점은 기실 이 영화가 명확한 정치적 관점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박 정권의 타락을 비판하려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이 영화를 지지하게 되었을 뿐, 영화는 사실 일관된 진보적 관점이나 ‘역사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법원의 부분 삭제 판결 때문에 정치적인 관점을 날카롭게 벼리지 않는 영화가 이념적인 대립을 유발한 것이야말로 ‘뜬금없는’ 일인 듯하다.정치적 판단의 부재는 감독 스스로도 인정하는 점이다. 정치적 가치판단의 부재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는 서로 구분이 잘 안 되고 모두 허둥댄다.

박정희는 뜻밖에 우아하고, 김재규는 거사를 치른 후 일촉즉발의 혼란 와중인 육본에서 한가하게 낮잠을 잔다. 그 정치적 애매함에서 생기는 위험이 분명히 있고 그 점은 충분히 지적돼야 한다. 그러나 만일 영화가 정치적 가치를 넘어 사실을 미학적으로 제대로 그렸다면, 정치적 가치판단의 부재 자체를 쉽게 비난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아쉽게도 영화는 그렇게 하지 못한 듯하다. 이 점에서 이 영화를 둘러싼 논의의 핵심은 정치성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미학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 있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저 보여주자고 생각했다. 추악한 진실이 있기 때문에 너희들이 죽은 거야, 이렇게 말할 의도도 없었다. 내가 사실을 보여주면 그 사실이 생각을 낳을 거라고 기대했다. 나보고 정치성이 없어서 비겁하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강력한 정치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보여주는 것이 그 자체로 정치성이 있을 만큼 영화는 미학적 사실성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인물들을 그리는 시각들은 뒤죽박죽이다. 김재규(백윤식분)도 반은 우아하고 반은 얼빵하며, 주과장은 중정 간부답게 충실하게 실무적으로 고민을 하고, 중정직원의 서민적 삶은 연민의 대상으로 부각되고, 술자리에 불려갔던 여자의 엄마이면서 중정까지 와서 깽판을 부리던 여자(윤여정분)은 끝부분에서 난데없이 남은 인물들의 운명을 비아냥거리는 ‘중요한’ 내레이션을 맡는다. 어수선한 와중에서 그나마 전체적으로 유지되는 분위기가 있다면, 코미디뿐인 듯하다. 어설픈 행위를 하는 인물들은 어설프게 낄낄거리면서 관객도 그렇게 만든다.

보수적인 사람들이 말하듯 영화가 ‘싸가지가 없다’고 말하자는 게 아니다(물론 그 말에도 되새겨야 할 점은 있다. 영화의 일관되지 못한 미학은 결국 그들을 비판적으로 설득하지 못한 채, “뭐야, 그저 싸가지 없는 영화 아니야!”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할 권리를 주는 듯하다). 웃기는 역사를 블랙 코미디로 만들려는 의도는 좋다. 문제는 영화가 당찬 블랙 코미디에 못 미친다는 데 있다. 블랙 코미디가 되려면 영화는 더 시커먼 구멍을 보여줘야 했고, 허약한 인물들에 대해 부드러운 연민의 시각을 유지하려면 더 차분해야 했다. 어설픈 코미디는 웃음조차 헛헛하게 만든다.

이 정도의 애매한 코미디로는 박정희 혹은 어떤 과거사 유령도 제대로 상대할 수 없다. 유령은 건재한데, 그 앞에서 그를 경멸하는 시늉으로 시시덕거리는 꼴이라고나 할까. 이념이나 엄숙주의에 빠지지 않고서도 과거와 멋있게 정면 대결하는 미학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필요하건만, 한국 영화는 왜 이다지 어설프게 코미디로만 빠지는가.

물론 1990년대 이후 한국 대중문화에 코미디 경향이 강해진 것도 사실이며, 그럴만한 이유도 충분히 있다. 감당하기 힘든 문화적 충격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블랙 코미디도 충분히 훌륭한 미학이 될 수 있지만, 그저 낄낄거리는 것만으로는 턱도 없다.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 얼마나 독한 미학적 훈련이 필요한지!

김진석 / 인하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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