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적인 사유 체계는 대단히 공격적인 단순 무식한 신념 체계로 발전한다. 둘을 나누는 경계선이 너무나 뚜렷해 건너갈 수 없는 깊은 심연과 같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항상 저쪽이 내 쪽을 공격해 완전히 무너뜨릴 태세를 취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저쪽이 내 쪽을 공격해 오기 전에 선제공격을 해서 저쪽을 무너뜨리는 길 외에는 내 쪽이 살아날 길이 없다고 여긴다. 서로가 너무나 닮아 있어 저쪽의 모습에서 거의 정확하게 내 쪽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데도, 그러니까 사실은 순전히 저쪽에 대한 반동적인 기운에 의해 내 쪽의 근간이 형성되어 있는데도 미친 듯 죽어라고 저쪽에 대한 공격을 일삼는다.
미 대선이 있기 직전 오사마 빈 라덴이 9.11 테러 못지않은 제2의 대대적인 테러가 있을 수 있다는 인故娥?공개됐을 때, 1987년 대한민국 대선 직전에 KAL기 폭파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폭력은 근본적으로 반동적이다. 폭력은 반동적인 폭력을 일으키고, 그 반동적인 폭력은 다시 반동적인 폭력을 일으킨다. 그런 과정이 없이는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도 영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분법적인 신념 체계에서 볼 때, 평화는 전략전珦岵?잠재적인 폭력의 준비 과정 즉 냉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분법적 신념 체계에 확실하게 물든 자들은 저쪽이 내 쪽보다 확실하게 강하다고 여겨질 때에는 쉽게 피학증적 태도를 보이고 저쪽이 내 쪽보다 확실하게 약하다고 여겨질 때에는 쉽게 가학증적 태도를 보인다. 확실한 기회주의가 뿌리 깊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시청 앞 광장에 모인 복음주의인지 근본주의인지 둘 다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독교인들의 반동적인 세력 과시에서 이를 쉽게 읽을 수 있다. 군사독재 시절 그 강고한 이분법적 신념 체계에 의한 폭력에 의해 피학증자처럼 쾌락을 즐기던 세력들이 이분법적 신념 체계를 공고히 떠받치던 법을 폐지하려하자 견디지 못해 반동적인 힘을 과시하면서 가학증자로서의 쾌락을 즐기는 것이다.
제 스스로 삶을 궁극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길이 없을 때, 그런데도 삶을 정당화할 길을 찾고자 할 때 가장 손쉽게 빨려드는 것이 이분법적인 신념 체계다. 타자의 죽음을 수단으로 해서 내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데서 끝내는, 내 삶의 이유를 오로지 타자의 죽음에서 찾고자 하는 비참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이분법적인 신념 체계다. 그래서 정확하게 딜레마에 빠진다. 정작 타자가 절멸되면 내가 닭 쫓던 개의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닭이 어디 한 마리뿐인가. 닭이 없으면 자신의 표상 바닥에 가상의 닭을 만들어서라도 공격할 것이다. 바깥에 적이 없으면 내 속에서라도 적을 만들어 공격을 하지 않으면 사는 맛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정도로 이분법적 신념 체계는 그 뿌리에서부터 타자 공격적이면서 자기 공격적인 타자 관계라고 하는 딜레마가 작동하고 있고 또 그런 가운데 반동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이분법적인 신념 체계에 대한 비판마저 이분법적이다. 신념 체계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이분법적이기 때문이다. 이 글 역시 이분법적 신념 체계에 의한 것으로 읽혀질 것이다. 그러니까 이분법적 신념 체계는 절대적인 자폐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