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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색깔의 인문학
학이사-색깔의 인문학
  • 이성훈 경성대
  • 승인 2004.05.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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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훈/경성대 예술철학

지난 겨울방학에 자료수집차 유럽을 둘러본 적이 있다. 그 놈의 프랜시스 베이컨 때문에 패권주의적이면서도 그걸 미국 뒤에 숨겨놓고 있는 음흉한 나라 영국에도 가야만 했다. 살인적인 물가, 밖으로 뱉어낸다기보다는 목구멍 속으로 집어삼키는 것처럼 들리는 영국식 영어 발음, 동양남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수상쩍은 눈초리를 한 번쯤은 더 보내는 공항 관리들, 모든 게 영 마땅찮았지만 내가 본디 하기로 한 일 외에 영국이 매력적인 나라로 비춰지는 게 무슨 연유에서인지 짧은 체류기간 동안이나마 알아보고픈 오기가 솟아났다.

도착 다음날 빨간색 이층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걸어가면서 영국의 겨울이 한국의 겨울에 비해 녹색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그게 상록수가 더 많이 심겨져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영국의 겨울이 우리보다는 덜 혹독하므로 낙엽수도 겨울까지 푸른 잎을 간직할 수 있어서인지 모른다. 사실 우리나라는 겨울철에 만물이 죽어 있다가 봄이 되면 기적처럼, 거짓말처럼 푸른색이 돌아온다. 한국은 겨울과 봄의 풍광이 확연하게 차이가 나고, 이런 이유로 우리는 정말 신기하기 짝이 없는 봄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놀라움은 초록색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았다. 영국을 괄목상대할 기회는 뜻밖에도 너무 빨리 찾아왔다. 내가 탄 이층버스가 S자로 꼬부라진 버스전용차선으로 진입할 때였다. 버스가 이층일 뿐만 아니라 두 대의 차량이 달려 있으므로 곡선을 돌 때 여유있는 공간이 마련돼야 하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일 터. 그런데 그 곡각지점에 버스의 진입을 위해서는 필요하나 실제로는 버스의 바퀴가 닿지 않는 공간에 선을 그어놓고 자동차 한 대를 위한 주차장을 만들어놨던 것이다. 거기에 세워져 있던 그 차는 아마 그 앞의 가게가 쓰는 차일 것이다.

이 장면을 보고 영국은 부가가치의 나라, 합리성이 갈 데까지 간 나라라는 느낌이 들었다. 변변한 산업 하나 없음에도 영국이 여전히 일정 수준의 경제력을 유지하고 전 세계의 관광객을 끌어당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극한의 합리성의 발휘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 말이다. 목적지인 내셔널 갤러리에 도착하니 다음의 특별전시회를 알리는 대형 현수막을 설치하고 있다. 사실 나는 그림을 보러 영국에 왔고, 또 그림을 보러 브뤼셀과 아테네도 갈 것이다. 지금까지의 전시방식은 대체로 유파 중심, 국가 중심, 시기 중심, 예술가 개인 중심 등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대형 현수막에 적힌 전시회의 주제는 파란색이었다. 파란색을 중심으로 작품들을 끌어 모아 전시하겠다는 것인데, 이것 또한 극한적인 합리성에 기반한 부가가치의 창출이지 않나 싶다. 사실 현대미술에서 파란색은 검정색이나 흰색만큼 예술가들이 애호했던 색상이다. 아마 그 전시회는 파란색, 아니 화가들만큼이나 다양한 파란색들에게 어떤 공통된 정당성을 부여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각각의 정당성을 부여받은 영국의 공공 미술관은 입장료로 지탱되는 게 아니라 이름도 거룩한 ‘기부’으로 꾸려진다.

내가 몸담고 있는 분야는 좁게 보면 예술철학이고, 넓게는 인문학이다. 몇 년 전에 인문학의 위기에 관한 열띤 논의가 이뤄졌지만 주로 인문학이 머무르거나 개척해야 할 영토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보기에, 인문학의 특수성은 학문영역이나 연구방법에 있는 게 아니라 인문학이라 불리는 것의 정당화에 있다. 그리고 정당화란 세상을 향해 마이크를 잡는 것이고, 그 논리에 감복한 사람들로부터 일종의 사회적 ‘기부’를 거둬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인문학 논의가 대답 없는 메아리로 그쳤지만, 요즘의 공학 위기 논의는 아예 정부와 언론계로부터 적극적인 공감을 얻어내고 있다는 데서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는 사안이다. 비유컨대, 인문학에도 파란색, 빨간색, 초록색 등이 있고, 이 색상들은 자신이 정당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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