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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가제 폐지’라는 유령
‘도서정가제 폐지’라는 유령
  • 교수신문
  • 승인 2020.09.2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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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 최익현 문화평론가

도서정가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출판생태계를 ‘약육강식의 밀림’으로 돌려놓자는 말과 같다.

정부는 민관협의체가 머리를 맞대고 도출했던 원안으로 돌아가야 한다.

 

필자는 세종도서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올해 학술·교양서 선정에 관여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자 직격탄을 맞은 출판계에 어떤 도움을 줘야 하지 않겠냐 하는 문제의식이 운영위원 사이에서도 화두가 됐다. 상·하반기에 걸쳐 진행해야 하는 세종도서 선정 사업을 상반기에 ‘모두’ 집행하는 것으로 결론을 낸 것은 오로지 그 때문이다. 입장도 철학도 서로 다른 운영위원들이 코로나19로 가뜩이나 더 어려워진 출판계를 지원하자는 데 뜻을 모은 것이다. 


그런데 세종도서 선정이 정말 도움이 되긴 할까? 그것도 경쟁과 심사를 거쳐야 하는 데 말이다. 그래서 ‘언 발에 오줌 누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럼에도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은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것은 시장에서 말하는 일반적 위기감과는 다른, 학술·교양서를 내는 관련 출판계가 백척간두에 내몰림으로써 시계 제로 상태의 어떤 ‘폐색(閉塞)’을 겪고 있다는 위험 신호였다. 


이런 가운데 난데없이 출판계에 유령이 출몰했다. 이 유령은 출판 생태계가 아니라, 외부에서, 갑자기 출현했다. 바로 ‘도서정가제 폐지’다. 3년마다 재검토되는 도서정가제는 2014년 이후로 큰 문제가 없어 2020년 재검토를 통해 유지되는 것으로 출판계는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의외였다. 2019년 10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도서정가제 폐지를 청원합니다’라는 글이 올라오며 삽시간에 상황이 꼬였다. 

 

출판계에 나타난 유령, 생태계 흔들다

청원의 내용은 이렇다. “지식 전달의 매체로서 책은 언제나 구할 수 있는 곳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돼야 한다. 도서정가제는 부담스러운 가격에 도리어 독자들로부터 책을 멀어지게 하고 있다”라고 지적하면서, 도서정가제로 인해 동네 서점이 감소했으며, 출판사의 매출도 위축됐고, 책값이 올랐으며, 독서인구는 줄어드는 등 도서 시장이 망가졌다고 한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은 어렵지 않다. 각종 출판통계가 이를 방증한다. 2003년 3,589개였던 서점은 2013년 2,331개로 감소했지만, 도서정가제가 정착된 이후인 2019년에는 2,312개로 감소세가 크게 완화됐다. 2014년 4만4,148개였던 출판사는 2018년 6만1,084개로 대폭 늘었다. 도서정가제가 작은 서점들을 키워냈고, 사라졌던 동네 책방을 살려냈다. 개성 넘치는 1인 출판사에서 소규모 출판사까지 다양한 출판 환경이 만들어진 것도 도서정가제와 무관하지 않다. 


국민청원 게시판에 각자가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책은 저렴한 가격에 공급돼야 한다’, ‘부담스러운 가격에 독자들이 책과 멀어지고 있다’ 등의 근거도 없고, 모순된 주장들은 오랫동안 한국문화사와 지성사의 축을 담당해온 한국 출판의 힘을 폄훼하고 사기를 꺾어버릴 수도 있어 우려스럽다. 저자와 편집자의 열정과 지혜가 온축된 책은 적정 가격에 공급돼야 한다. 적정 가격에 책을 사고, 그래서 그 판매의 힘으로 새로운 양서를 다시 기획하고, 그 책을 통해 문화의 눈높이가 상승하는 선순환 구조가 중요하다. 


3년마다 도서정가제를 재검토하는 작업은 민관협의체 즉, 정부와 출판계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진행했던 일이다. 지난 1년 동안 협의를 하고, 합의안에 거의 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전자출판물’의 할인폭을 확대하는 ‘전자출판물 별도 규제’를 포함한 ‘추가 개선(안)’이 날아왔다. 2019년 10월, 국민청원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의혹을 사고 있는 대형 플랫폼사의 진입을 위한 길을 터주고, 새로운 출판산업을 육성해보겠다는 정부의 ‘시장 개척 의지’가 작용한 것일까? 

도서정가제 시행으로 학술출판 생태계가 더 나아진 부분이 있다. / 사진 = 연합

한국 지성사의 축을 담당해온 책

한국의 학술·교양서 출판은 고단한 길을 걸어왔다. 뚝딱 잘 팔리는 책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호흡이 길다. 수입 번역서를 내놓기도 하지만, 우리 학계의 웅숭깊은 저자들을 발굴해 대중과 만나게 했다. 나는 우리 학술·교양 출판계가 단단한 ‘모노그라피’를 산출하는 데 인색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언제나 문화의 최전선에서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던져왔다. 소음도 있었다. 그래도 이들은 펄럭이는 문화의 깃발만 응시하고 달려왔다. 도서정가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책들이 전국 곳곳의 서점들, 대학교 구내 서점이나, 시장 입구 동네 서점이나 어디서든 독자들과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최근 대학로에서 공익서점을 표방해왔던 ‘책방이음’이 폐점을 알리는 글을 올려 가슴이 먹먹하다. 글의 한 토막이다. “만약 할인을 더 많이 한다면, 할인을 할 수 있는 서점, 할인을 할 수 있는 출판사, 할인하는 책, 할인하면 더 많이 나가는 저자만을 위한 세상이 펼쳐질 것입니다. 영세자영업인 동네책방, 1인 출판사, 독자가 소수인 책, 첫 책을 내는 저자의 자리는 현저히 줄어들거나 사라질지도 모릅니다.”(<월간경실련>, 2020년 9~10월호)


책이 전부인 이들과 책은 그저 하나의 서비스품목에 지나지 않는 이들은 생각의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저자와 독자, 출판사와 서점이라는 출판 생태계가 가까스로 기본 체력을 다져가고 있다. 도서정가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이런 출판 생태계를 다시 ‘약육강식의 밀림’으로 돌려놓자는 말과 같다. 더구나 이 주장은 실체가 흐릿한, 마치 거대한 유령과 같은 존재들의 언어여서, 투명성이라곤 겨자씨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민관협의체가 머리를 맞대고 도출했던 원안으로 돌아가야 한다. 

 

최익현 문화평론가

 

최익현 문화평론가는 중앙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수신문>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굿모닝 밀레니엄, 오늘의 우리이론 어디로 가고 있나등을 기획했다. 아직도 책과 문화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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