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4:10 (금)
문화비평: 家族, 관념에서 생성으로
문화비평: 家族, 관념에서 생성으로
  • 김용규 부산대
  • 승인 2004.01.0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요즘 들어 언론에서 부쩍 일가족의 비극적 죽음을 접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한 가장이 처자식과 함께 목숨을 끊는 일이나, 사위가 처의 부모를 모두 죽인 사건 등, 주변에 가족을 동반한 죽음이 줄을 잇고 있다. 또한 한 비정한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차디찬 한강 속으로 던져 죽인 사건은 마치 우리를 차가운 바다 속으로 던져 넣는 듯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왜 혼자 죽을 수는 없는 걸까. 아니 왜 더불어 같이 살 수는 없는 것인가. 

혼자 죽지 못하는 데는 우리 무의식 깊은 곳에 가족을 혈연으로 맺어진 운명공동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는 말 속엔 함께 죽을 수도 있다는 비장한 각오가 들어있다. 사실 가족을 혈연적 운명공동체로 생각하는 건 인간의 자연스런 조건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근대의 폭력적 국가권력이 개인을 유기적 집단공동체의 일원으로, 그리고 집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존재로 규정하고 그것을 우리 의식 속에 내면화시킨 것이 한 이유가 될 것이다. 

혈연 중심의 가족관계가 문제가 되는 건 무엇보다 그것이 인간관계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관계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건 혈연을 맺지 않았지만 일상생활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의 구체적 관계보다,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혈연구조 속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우선시하게 만든다. 특히 이런 관계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도록 자극하기보다는 관계 속의 위치를 통해 사람을 규정하도록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매일같이 자식과 아내를 학대해도, 아버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런 혈연관계는 국가권력의 통제가 약화되거나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자식의 대학입학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일상적 삶쯤은 기꺼이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어머니나, 아이교육을 위해서라면 몇 년 쯤은 가족과 떨어져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는, 가족과 더불어 현재를 만들어 가는 삶을 포기한 현대판 혈연가족에 속한다. 결국 혈연 중심 관계에서는 새로운 관계의 ‘생성’보다는 현재 고착화 돼있는 변하지 않는 혈연이라는 ‘관념성’이 우위를 획득한다.

하지만 이런 혈연관계에 근거한 운명공동체로서의 가족은 오늘날 급격히 해체되고 있다. 세계 3위를 자랑할 정도로 한국의 이혼율은 이미 선진국의 대열로 진입하고 있다. 하지만 이혼사유는 아주 후진적이다. 혈연적 가족관계는 다양하고 새로운 형태의 가족관계를 요구하는 사회변화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생성의 노력 없이 관계로만 유지되던 가족이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가족은 서로 다른 이질적 타자들이 접속해 형성된 공동체다. 이런 타자들의 이질성을 운명적 자연성으로 바꿔놓은 게 사랑의 기능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이질성을 은폐한 환상 그 자체다. 환상이 깨지는 순간, 혈연적 가족관계는 앙상한 인간관계만을 드러낸 채 뿔뿔이 흩어진다.
최근의 가족붕괴 현상은 혈연적 가족관계의 해체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의 실패를 나타낸다. 해체된 가족의 집은 이질적 타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접속해 공동의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멈춘 곳이며, 타자의 삶을 관용하지 못하는 편협함이 판치는 곳이다. 이런 타협과 관용의 훈련이 부재하는 곳에선 소통과 연대가 필요한 민주주의 또한 좌절될 수밖에 없다.

가족의 해체는 가족에 대한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제 가족은 개인이 자율성을 상실한 채 집단적 구조의 일원으로서만 존재하는 혈연관계에서 새로운 목표를 앞에 두고 서로 관용하고 조율하며 구성원의 자율성을 키워가는 상생의 공동체로 바뀌어야 한다. 이런 생성의 공동체에선 사랑이라는 환상이 끝나는 지점이 타자를 인정하고 진정한 연대를 고민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이 될 것이다.

김용규 / 부산대·영문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