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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여성 전사와 영웅 숭배
문화비평: 여성 전사와 영웅 숭배
  • 장영란 한국외대
  • 승인 2003.11.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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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근육질의 여성 전사들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예전에는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채널을 돌리기 일쑤였다. 여느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여자 주인공이나 조연들은 사건의 전개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항상 결정적으로 일을 망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가령 사건 해결에 중요한 단서를 갖고 도망치는데 여주인공이 어설프게 뛰어가다 넘어져 남자 주인공까지 모두 잡혀버리거나, 또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머뭇거리다 악당들에게 잡혀 남자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리는 장면들이다.

단지 전체 플롯의 일부일 뿐이라 생각하며 액션 자체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모든 걸 망쳐버리고는 누군가의 도움만 바라며 눈물을 흘리고 앉아 있는 얼굴만 예쁜 여자 조연을 보면, 분통이 터져 아예 -솔직히 TV를 내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 전원을 꺼버리는 경우도 있다.

나아가 선악의 대결 구도로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가 분명하게 구분된 콩쥐와 팥쥐 식의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자의 적은 여자’로 몰고 가는 구성과 줄거리는 매우 유치하다. 차라리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악녀가 낫다. 왜냐하면 최소한 바보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악녀들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철저히 계산된 행동을 하며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아 보다 자율적이며 강력한 이미지를 지닌다. 반면 남자 주인공에게 도움 받을 때까지 넋 놓고 있는 여주인공들을 한심하기 짝이 없다. 단순히 여 주인공의 팔다리의 근육과 근력을 빼내었을 뿐만 아니라 머리 속까지 송두리째 비워버렸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영화 등에서 전사의 이미지로 꾸준히 여성 캐릭터가 만들어진다는 건 우리 세대의 사고가 많이 바뀌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현란한 기술과 동작으로 수많은 악의 무리들을 통쾌하게 물리치는 여전사의 모습은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못하는 나약한 ‘공주형’이나 자신처럼 힘없는 다른 여성을 공격하는 ‘악녀형’만을 봐오던 세대에게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현대의 여성 전사들은 두 가지 편견에서 엄청나게 진화했다. 하나는 여성은 ‘약자’라는 편견이다. 그러나 여성전사들은 육체적으로 강인하며 뛰어난 무술 솜씨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아주 지혜로워 전략/전술에도 뛰어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자기 일은 잘 처리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까지 한다.

다른 하나는 여성은 ‘악’ 혹은 악의 원천이라는 편견이다. 그러나 여성 전사들은 오히려 악의 무리와 한바탕 싸움을 벌인다. 여기서 여성은 악이 아니라 악을 소탕하는 전사다. 

그렇지만 새로운 유형의 여성 전사들에게서도 곧 석연찮은 면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G.I. 제인이나 에어리언의 리플리 같은 근육질의 여성이 단순히 기존의 남성 영웅을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여성 전사는 근육질만 좀더 생겼다 뿐이지 얼굴도 예쁘고 늘씬하다. 미녀 삼총사의 카메론 디아즈나 툼레이더의 안젤리나 졸리, 에일리언의 시고니 위버 등은 자타가 공인하는 미녀들이다. 그들은 한편으로 여성이기 때문에 동질감을 느끼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동일시가 불가능하다.

일반 여성들은 남성전사 보다도 오히려 여성전사에 의해 철저하게 타자화 된다. 마지막으로 여성전사들은 성적 매력을 과도하게 표현해 여전히 남성적 욕구의 대상이 되도록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기존의 틀을 그대로 고수한다. 

물론 대중 매체가 흥미와 오락추구를 위한 것이기에 변화에는 한계가 있지만, 현재 변화라고 보여지는 것들조차 단지 기존 남성중심 코드를 여성중심 코드로 슬쩍 바꿔치기 해놓는  수준이다. 그건 기존의 서부 영화나 현대 SF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영웅숭배주의’에 식상한 관객들에게 폭력과 성적 욕망을 결합시켜 하나로 만든 변종일 뿐이다.

우리 시대의 문화적 산물들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진정한 영웅이 없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그리스 비극의 영웅들이 우리에게서 보편적인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단순히 힘과 폭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운명과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철학을 내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장영란 / 한국외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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