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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냥 차는데.....”
“난 그냥 차는데.....”
  • 김누리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3.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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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오랜만에 동네 후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외국보험회사에 들어갔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 사이 꽤 높은 지위에 오른 모양이었다. 그간의 안부를 묻고 나서 우리 사이에 오간 대화이다. .“형, 가끔 필드에 나가세요?”
“필드? ..... 응 가끔.....”
“얼마나 치는데요?”
“치다니..... 난 그냥 차는데.....”
‘필드’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정말이지 알지 못했었다. 주말이면 가끔 동료교수들과 축구를 하던 터라 필드란 말에 곧장 ‘운동장’을 떠올렸던 거다.
이제야 나는 안다. ‘필드’란 ‘골프장’을 뜻하며, 이것은 이 땅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은어라는 것을. 그 후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세상물정에 어두웠는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동창회든, 초상집이든, 결혼식이든, 오랜만에 친구들이 모이는 장소에 가면 단연 으뜸가는 화제가 ‘골프’ 이야기가 아닌가. 
과연 골프열풍이 불긴 부는 모양이다. 아침 신문에 따르면 “현재 건설 중이거나 올해 착공 예정인 골프장은 현재 1백65개의 골프장 수의 절반에 가까운 80개며, 골프장 건설 열풍은 수도권 지역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추세라, 이대로 가면 우리나라 골프장은 곧 3백곳을 넘어설 것이며, 80개의 새 골프장 건설에 5조원이 넘는 자금이 투입될 것”이란다. 
이런 골프열풍은 어디서 불어온 것일까.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이 ‘화려한 광풍’이 왜 하필 우리에게 불어닥친 것일까. 유독 한국인의 피 속에 골프와 친화력이 있는 유전인자라도 박혀있단 말인가. 그것이 이제 먹고 살만해졌기에 비로소 발현된 것일까. 아니면 한국의 경제성장에 걸맞는 스포츠를 이제야 찾아낸 것일까. 아니다. 나는 골프열풍이 이 땅의 ‘출세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차별강박’에 기인한다고 본다. 삐에르 브르디외는 ‘계급분화와 계급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남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여 두드러지게 하는 것’을 디스뗑끄시옹(distinction)이라고 했다. 골프는 바로 자신의 계급상승을 남들로부터 확인받고 싶어하는 한국인들이 가장 ‘애용’하는 디스뗑끄시옹의 기제일 뿐이다.    
세계적인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의 ‘취미’는 주말마다 국무성 문서를 읽는 거란다. 그의 서재엔 비밀 해제된 국무성 문서들이 빼곡이 쌓여있단다. 제3세계 국가들을 상대로 CIA가 벌인 추잡한 공작과 인권유린의 사례들을 샅샅이 들추어낸 그의 저작들은 다름 아닌 그의 ‘취미’의 성과물인 셈이다.
아직 철이 덜 든 모양이다. 친절하게 골프를 권유하는 친구들보다는 촘스키의 별난 취미에 더 마음이 끌리니 말이다. 골프장에 펼쳐진 눈부시게 푸른 잔디의 유혹보다 도처에 널려있는 ‘세계의 비참’에 대한 분노가 나를 움직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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