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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여성사와 삶의 다중성
학이사-여성사와 삶의 다중성
  • 주진오 상명대
  • 승인 2003.10.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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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오/상명대 사학 

1995년부터 교양과목으로 한국여성사를 강의하게 됐다. 처음에는 당시 여자대학으로서 필요한 과목이라 생각하여 개설해 놓았는데, 강의를 맡아줄 분을 찾지 못해 단지 사학과 교수라는 이유로 강의를 맡게 됐다. 한 학기만 하겠다고 생각했던 이 강의는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덧 세 클래스로 분반이 되고 학기당 3백명 가까운 학생들이 수강하는 강의로 자리잡았다. 게다가 요즘은 대학원 강의는 물론 TV 강의까지 여성사를 주제로 진행했으니 이제 여성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돼버린 셈이다.

지금도 학생들 가운데에는 한국여성사 시간에 남자교수가 들어와 의외라는 반응이 많다. 당연히 ‘전투적 페미니스트’ 인 여자 선생님을 예상했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도 한국근대 정치사상사를 전공하는 것으로 알려진 내가 여성사를 강의한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사실 여성사를 강의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운 것은 강의를 하는 나 자신이다. 그동안 진보적 역사학계의 한 귀퉁이에서 지배권력 집단의 억압과 차별에 대해 비판적 역사해석을 해왔지만 정작 내 자신도 다른 측면에서는 체제의 수혜자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가해자였다는 점에 대한 자성 때문이다. 나름대로 여성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자부해 온 것이 처절하게 무너지는 날들이었다. 또한 가부장제라는 구조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에게조차 ‘거대한 감옥’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결국 한국여성사를 강의하는 것은 단지 여성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본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남성 자신을 위해서라도 궁극적으로 억압과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확인시켜 주는 계기였다. 더욱이 여성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본다는 것은 역사학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여성이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성이 여성사를 강의하고 연구하게 되었을 때 따르는 효과도 크다고 본다. 이는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이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에서 그런 것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더욱이 인간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믿는 진보적 역사학자에게 여성사는 중요한 연구의 소재가 된다. 여성사는 민중사의 한 영역이며 성차별은 우리 시대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억압구조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성문제는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의 하부 또는 부차적 영역이라기보다는 동시에 이뤄져야 할 차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대학에서 여성사 강좌는 드물고, 더욱이 여성사는 당연히 여성들만의 영역으로 내모는 대학풍토에서 여성사 전공자들은 홀대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비약이 될지는 모르나 오늘날 역사학의 위기를 초래한 이유 가운데 이런 분위기가 하나의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여성사를 강의하면서 허영에 가득 찬 현실도피주의자로만 생각했던 신여성들이 바라봤던 당시 한국사회는 어떤 것이었을까를 생각해본다. 또한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들은 과연 자신의 가정에서는 어떤 존재였을까 돌아보게 된다. 결국 인간에게는 ‘삶의 다중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이뤄지고 있는 연구들 가운데 일부가 기존 역사관이 가지고 있는 관념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은 일정 부분 인정이 가능하지만 또 하나의 일면적 역사해석에 빠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다. 앞으로 이런 문제들에 대한 토론이 앞으로 젠더를 초월해 활발하게 이뤄지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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