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9:10 (금)
학이사-몸으로 체득하기
학이사-몸으로 체득하기
  • 김성룡 호서대
  • 승인 2003.10.2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성룡/호서대 국문학

생각하는 것과 깨닫는 것이 다르고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작년부터 나는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 다닌다. 천안천변을 따라 걷다가 단국대 교정으로 들어가 천호지 호변을 걸어서 상명대 입구를 지나 주택가를 조금 걸으면 우리 호서대이다. 이렇게 하면 겨울이면 50분쯤, 여름이면 그보다 조금 더 시간이 든다. 찻길을 따라 걸으면 빠르긴 하겠지만 시끄러운 데에다가 먼지를 뒤집어 써야 하므로 일부러 돌아서 걷는 길을 택했다.

걷기 위해서는 신발도 바꿔야 하고 옷도 바꿔 입어야 했지만 특히 가방이 문제였다. 손에 드는 가방은 아주 불편해 어깨에 메는 가방으로 바꿨다가 등에 지는 가방으로 바꿨다. 어깨에 메는 가방까지는 나이에 걸맞는 것을 찾아 구입했지만 등에 지는 가방은 그런 것을 찾지 못하여 딸아이가 썼던 것을 찾아 쓰고 있다. 가방을 등에 지면서 손의 해방이 머리의 해방이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고 보니 걷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일이다. 걸으면서 책을 볼 것도 아니고, 말상대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저 혼자 걸을 뿐이다.

십사 년 전 바로 이맘때 난 군에서 제대해 선생님 연구실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책 읽는 일이 즐겁고 또 그것을 공부라고만 여겼으므로 열심히 책을 읽어 모자르는 학식을 보충해야 한다는 결심으로 읽고 또 읽었다. 연구실에서 공부한 지 석 달 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연구실 책상에서 책을 펼쳐놓고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나의 뒤에서 한참을 내려다보시더니 책을 덮고 밖에 나가라고 분부하시는 것이었다. “자네는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멍청해졌다.” 하시면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학문의 길에는 책을 읽어 안 것으로 부족하고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 도달해야 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흐리멍텅해진다”는, 귀에 때가 내려앉도록 들었던 ‘논어’의 한 구절을 그때 선생님 연구실에서 쫓겨나면서 알았던 것이다. ‘너무 많이 읽어 흐리멍텅한’ 제자를 위해 선생님께서 내리신 처방이 바로 걷기였다. 과잉의 양분이 비계가 되듯 머리 속에 쌓인 지식의 기름기를 걸으면서 빼라는 분부셨던 것이다. 그때는 계속할 것만 같았는데 우리 학교로 부임하면서 계속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작년 불현듯 걸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걷는 목적은 무엇일까. 도착지도 아니고, 지점을 경유하는 것도 아니며 더더군다나 시간을 경신하는 것도 아니다. 걷는 일에 충실하는 것이 걷기의 목적이지 않을까. 인생도 삶의 종착지를 목적으로 한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이 되는가. 또 이러저러한 지점을 설정하고 빨리 도달하기를 바란다면 얼마나 초조한 일이 되는가. 학문도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학문이 도착지가 어디 있겠는가마는 학문의 목적은 도착지 보다는 도달하는 과정이 충실함에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런 평범한 진리도 아는 것 다르고, 깨닫는 것 다르고, 체득하는 것 다르다는 것도 알 것만 같다. 知解보다는 頓悟해야 하는 것이고, 頓悟하면 또 漸修하는 것이 학문의 길이 아닌가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