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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가해자일 수 있다
당신도 가해자일 수 있다
  • 김계현 서울대 교육학
  • 승인 2003.10.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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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논단

서울대에서 ‘성희롱·성폭력 상담소’를 설치한 것은 2000년의 일이다. 필자는 이 상담소의 초대 소장으로 2년간 보직을 수행한 바 있으며 이 글의 청탁을 받아들인 것도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상담소장을 하는 동안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학생, 교직원, 교수들의 의식을 널리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므로 그 경험의 일부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먼저, 당신이 아무리 대한민국의 평균인, 보통사람이라 하더라도 성희롱·성폭력에 대해 당신과 다른 견해와 생각, 느낌을 가진 사람이 엄청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교수가 동물유전학 관련 수업시간에 동물의 교미행위를 다소 유머스러운 말로 묘사한 것을 성폭력으로 문제삼아 대자보 붙이기, 토론회 열기, 대학본부에 항의하기 등의 행동을 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 교실에 50명의 학생이 있었고 그 중 한두 명만이 교수의 강의에 대해 성적 수치심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얼마든지 문제를 삼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분명히 성희롱·성폭력 의사가 전혀 없었더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성희롱·성폭력이라고 느꼈다면 일단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당신이 강의나 혹은 기타 사적인 자리에서 자기변명이 심한 학생을 나무라는 중 “처녀가 아이를 배도 핑계가 있다더라”라는 말을 인용하여 그 학생을 나무랐다고 하자. 그런데, 이 말을 들은 학생이 당신의 그런 발언을 문제 삼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상황에서 당신은 단지 그 말을 비유로 사용했을 뿐인데 그 말에 대해서 “미혼 여자는 임신을 해서는 안 된다는 즉 여성에 대한 편견을 담은 발언”이라고 문제시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희롱·성폭력은 강간이나 강제추행 등 강력한 직접적인 가해행위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경미해 보이는, 혹은 전혀 성희롱·성폭력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성희롱·성폭력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객관적으로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성희롱·성폭력인지 규정하기가 어렵다. 성희롱·성폭력 부분은 다분히 본인 혹은 목격자가 어떻게 느꼈는지를 일단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누구나 성희롱·성폭력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낳는다.

 

이번에는 대학에서 자주 문제되는 다른 상황의 예를 들어보자. 교수가 학생들과 회식 모임을 가지고 노래방에 갔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교수가 한 학생에게 춤을 청했고 그 학생과 소위 ‘부르스’를 추었다. 그 학생 본인은 특별하게 성희롱·성폭력이라는 느낌이 없었을 수 있다. 그러나 제3자가 그것을 성희롱·성폭력으로 문제 삼을 수도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이 어떤 행위에 대해서 성희롱·성폭력을 범했다고 신고했다고 해서 당신이 그 자리에서 가해자로 판명되는 것은 아니다. 조사와 심의를 거쳐서 올바른 판정이 내려지진다. 그러나, 그 조사와 심의의 과정에서 당신은 모멸감을 느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성희롱·성폭력 예방에 관련된 규정 때문에 학생과 교수의 관계가 비인간화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럴 우려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대학 캠퍼스에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파렴치한 성희롱·성폭력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대학에 성희롱·성폭력 상담소를 두는 근본 취지는 교수-학생 간, 교수-직원 간, 선배-후배 간 불균등한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공식기구에서 다뤄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기인한다.

교수들은 자신의 무의도적인 발언을 성희롱으로 혹은 성폭력으로 받아들이는 학생이 있을 수도 있다는 입장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대학의 성희롱·성폭력 관련 규정을 교수나 선배를 골탕먹이려는 수단으로 악용해서도 안 되지만, 동시에 그것을 계기로 하여 성과 관련된 감정이 개인마다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서로 조심하고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문화를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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