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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을 다시 읽으며
전혜린을 다시 읽으며
  • 김누리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3.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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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얼마전 전혜린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었다. 마치 오래 잊고 지내던 옛사랑을 만나듯 설레는 마음으로 내 젊은 날을 온통 사로잡았던 그녀를, 나를 독문학으로 유혹한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런데 어인 일인가. 책장을 넘길수록 설렘은 짜증으로, 예전의 감동은 허탈감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다시 그녀를 읽으며, 내 젊은 날의 전혜린이 허상이었음을 본다. 도대체 전혜린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던가. 그녀가 느끼고, 생각하고, 교류한 방식, 한 마디로 그녀의 실존적 삶은 고유성을 상실한 소외된 삶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문학작품 속의 가상세계를, 그러니까 데미안과 니나와 파비안의 삶을 현실세계에서 모방하려고만 하였을 뿐,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한국판 보바리’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전혜린에겐 시대도, 역사도, 현실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젊은날은 독일에서나 한국에서나 엄청난 격변의 시절이었다. 그녀가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던 50년대 말은 핵무장 반대 시위로 독일 전역이 정치적 태풍에 휩싸였던 시기였고, 국내로 귀국한 이후는 4.19와 5.16으로 한국사회가 요동치던 시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글에서는 이러한 시대상을 드러내는 단 한 단어, 단 한 구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철처히 시대적 현실의 ‘문밖’을 서성이며, 그야말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혜린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 꼭꼭 갇혀있었다. 그녀가 이따금 눈을 밖으로 돌린 경우조차, 내면 밖의 현실은 그저 그녀의 개인적 욕망을 투사한 세계에 불과했다. 그녀가 그토록 낭만적으로 그려낸 뮌헨의 예술가 거리 슈바빙의 세계도 현실로는 존재한 적이 없다. 그것은 그녀의 동경과 절망과 고독을 투영한 전혜린만의 슈바빙이었을 뿐이다. 

전혜린을 내면세계에 가둔 건 ‘비범성에의 강박’이 아니었을까. 이미 중학교 시절 “죽어도 평범하게 살지 않으리”라는 좌우명을 책상머리에 붙여놓았다는 그녀가 아니던가.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이러한 비범성을 극적으로 완결시켰지만, 그녀의 죽음에서조차 시대적 고통의 흔적을 읽어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60, 70년대의 한국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전혜린 신화는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 그것은 독일현대사에서 가장 보수적인 시대였던 50년대 독일의 고루한 문화적 분위기를 ‘독일적 낭만성’으로 오독한 한 순진한 나르시스트의 시선을 막막한 시대의 탈출구로 오인한 한 세대 전체의 ‘이중 착시’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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