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41) -한 숟갈의 차이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41) -한 숟갈의 차이
  • 교수신문
  • 승인 2019.12.2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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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이름을 거꾸로 부르는 것이 그 친구의 별명이 된 벗 이야기다. 왜 친구들은 그를 그냥 부르지 않고 거꾸로 부를까?

바로 위 들어가는 문장에서 ‘친구’라는 말을 거듭 쓰기 싫어 ‘녀석’이라고 써놓고 마음이 편치 않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책에 ‘벗’이라고 바꾼 것을 보면 안다. 나는 거기에는 그에 대한 경외심, 존경심, 그리고 인격적인 인정이 들어가 있다고 본다.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친구가 있는 것이다. 단순한 호방함이나 명쾌함으로는 형용이 되지 않는다. 용기와 담력을 지탱하고 있는 그 어떤 철칙 같은 것이 그 속에는 있기 때문이리라.

그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은 세기의 대결 같은 것이었다. 이미 죽었지만 한 녀석이 ‘너와 비슷한 놈이 있다’면서 소개가 된 것이었다. 지역이나 학교도 달라 인위적이지 않으면 서로 만날 일이 없었는데, 둘을 붙여 놓으면  재밌으리라 생각됐다고 말했다.

그날 밤 이야기를 하자면 객기천국이었다. 내 제안이었지만, 큼직한 양초를 사다 놓고 이것이 다 탈 때까지 술을 마시자고 했으니 말이다. 음주만행, 그것이 지랄 맞은 만행(蠻行)이든 불교의 만행(卍行)이든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내 제안에 꿈쩍할 친구가 아니었다. 지금 보면 정말로 만화 같은 만행(漫行)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군대에서 바닷속에서 숨 참기 대회를 미군들이랑 할 때 기절할 때까지 있어서 사람들이 구한 이야기, 안전장비도 없이 바위계곡에서 보트 탄 이야기, 정말로 무식한 친구였다.

그럼에도 노래는 잘 불러서 양희은의 ‘한계령’은 정말 멋들어지게 끌었다 놓았다 한다. 요즘 말로는 싱커페이션(syncopation)이라는 당김음이 기막히다. 평소와 다르게 노래할 때 목소리는 약간 떨리는 듯 울려서 맛이 있다. 술 한 먹었을 때 나오는 촉촉한 음정은 정현종 시인의 ‘술 노래’ 속 ‘젖은 목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낭만은 있어서 함께 산에 다닐 때 정상마다 술을 묻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페트병이 없어서 산에 갈 때 물병이 늘 문제였는데(철제는 군용 수통처럼 물이 새서 바지를 적시기 일쑤였다), 오렌지주스 유리병을 밑에서 사서 거기에다 술과 담금용 약재를 넣어 정상까지 매고 올라갔으니, 정성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냥 올라가기도 힘든데 그 무거운 유리병에 소주를 넣고 기어 올라갔으니, 그것도 다음에 와서 마시겠다는 일념으로 지고 올라갔으니, 대단했다. 땅도 파야 하니 삽도 챙기고.

언젠가는 파보았더니 ‘잘 마셨소. 고맙소.’라는 쪽지만 들어있었던 적도 있었다. 서운함보다는 마신 사람의 답장이 더 회자하였다. 세상 물건 뭐 주인이 따로 있나, 즐기면 그만이지!

그런데 내가 그 친구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한 것은 다름 아닌 지리산중에서의 저녁때였다. 발이 빨라 늘 먼저 가서 일행을 위해 밥을 해놓았는데, 그날은 볶음밥이었다. 우리들이 밥을 먹기 시작하는데, 고등학생들이 우리 먹는 것을 보고 껄떡거리는 것이었다. 행색을 보니 초자들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나도 안 됐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아이, 저 새끼들 때문에 밥 못 먹겠네’하더니 코펠 통째로 ‘너희들 다 처먹어’라며 넘기는 것이 아닌가. 난, 한 숟갈밖에 먹지 못했는데 말이다.

나와 그 친구의 차이는 이랬다. 나는 한 숟갈만 더 먹었으면 했지만, 그 친구는 그것조차 안 넘어간 것이다. 나와 그 경외로운 벗과 차이는 바로 ‘한 숟갈’에 있었다. 고맙게도 그 친구는 나를 ‘야이, 무식한 박사야’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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