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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38)-다람쥐 죽다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38)-다람쥐 죽다
  • 교수신문
  • 승인 2019.12.0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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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맑은 물보다 중요했던 그것
정세근 교수, 충북대 철학과
정세근 교수, 충북대 철학과

오래된 일이지만, 매일 아침 나를 깨워주던 친구가 있었다. 아침잠이 없고 워낙 부지런한 친구와 한 동네에 살다보니 재수 좋게 얻은 혜택이었다. 아침마다 전화를 걸어 나오라고 해주니 고맙기 그지없었다. 게으른 내 천성을 이끌어주는 은인이었다. 주역에 나오는 말처럼 ‘대인을 만나서 이롭다’(利見大人)고 풀이되는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산에 다니는 것은 벗이 있으면 재밌게 마련이다. 우선, 서로가 서로에게 한 약속이다 보니 되도록 빼먹지 않아 좋았다. 그리고 대화가 통하니 즐거웠다. 그는 공돌이, 나는 문돌이, 둘 다 공부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과적인 지식을 얻어듣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그는 엉뚱한 내 거짓말도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때 안 것은, 우리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산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약수터는 하나의 정부이고 제도라는 사실이었다. 약수터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모여면 계가 생기고, 계가 생기면 회비가 생기고, 회비가 생기면 회장이 생기고, 회장이 생기면 총무가 생기고, 총무가 생기면 기금이 생기고, 기금이 생기면 회식자리가 생기고, 회식자리가 생기면 차기회장과 총무가 생기고, 그래서 약수터는 운영되었다. 약수터 시설도 그런 약수터 계를 중심으로 발전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같은 떠돌이에게도 물을 먹게 해주었으니 서로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약수터의 수질 검사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이 그 친구의 주장이었다. 환경공학을 전공하던 그에 따르면, 나라에서 하는 수질검사에서 ‘불합격’이 나오면 약수터 계가 깨지기 때문에, 수치를 조작한다는 것이었다. 약수터에 쓰인 매직이 지워지고 새로 쓰이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오래된 이야기다. 요즘 같으면 수질에 얼마나 민감한데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랬나보다. 물보다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였다. 맑은 물보다 중요한 것이 조직의 힘이었다. 아직까지는 군사정부 막바지 시절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집단을 위해서라면 수질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고가 용인되었나 보다. 하기야 온갖 부문에서 환경문제가 민감하게 대두된 것이 그 이후이니 그럴 만도 하다. 

약수터는 작은 정부였고, 약수터 운영진은 나름의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이 있었다. 수치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고 그것이 개인의 건강에 앞섰다. 조직과 집단의 총화를 위해서라면 중금속 조금 마시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자발적인 수치조작, 이 얼마나 슬픈, 사람들의 민낯이었던가. 민초들의 무던함과 몰개성이 세상을 휘어잡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의 작위는 인간에게만 한정되지 않았다. 이맘때 산야에 널브러져 있는 도토리를 모두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가방에 한 가득씩 담고 가는 탐방객들은 수시로 눈에 뗬다. 그런데 그 친구가 목격한 것은 다람쥐 사망 사건이었다. 어떤 다람쥐가 도토리를 모아놓는 나무 등걸이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 그 앞에 다람쥐가 죽어있었고 도토리는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질 조작에 이은 그의 두 번째 주장은, 사람들이 모아놓은 도토리를 가져가자 겨우내 먹을 식량이 모두 도난당했다는 절망감에, 다람쥐가 까무러쳐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동네 산 입구에는 ‘도토리 줍지 맙시다. 다람쥐가 먹을 것이 없어요.’라는 플랜카드가 걸려있다. 나도 전 재산을 탕진하면, 그것도 겨울을 앞두고 그랬다면, 스트레스에 죽을는지도 모른다. 애도, 다람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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