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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영원히 산다
영웅은 영원히 산다
  • 교수신문
  • 승인 2019.06.1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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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원고를 의뢰받고 다른 전공분야의 연구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좋은 주제가 무엇일까 한참 동안 고민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주제가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고통과 비관으로 가득한 글이 될까 두려웠다. 그보다는 학문후속세대인 우리가 공부를 처음 시작했던 출발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필자는 우리 고전문학 전공자로 영웅소설을 주로 연구하는 사람이다. 기아나 죽음의 위기에 몰린 주인공들이 비극을 떨치고 일어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나라를 구하는 모습에 매료되어 연구를 시작했다. 또한 다양한 고전소설 작품들의 이본(異本)을 연구하면서 아무리 먼 곳에 자료가 있더라도 어디든지 찾아가고 있다. 장성에 있는 필암서원에 가서 한겨울 추위에 떨면서도 자료를 읽으며 즐거워하고, 소장처에 따라 자료를 거절하는 냉정한 말들도 기쁘게 견뎌냈다. 만약 누군가 강권했다면 절대로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웅소설 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산이 있으면 넘어가면 되고, 바다가 있으면 건너가면 된다고 믿으며 무모하게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전공을 불문하고 젊은 연구자들이 박사학위 논문을 마치고 굽어진 허리를 펴면, 적어도 10년의 세월이 지나 있기 마련이다. 논문에 몰두해 있는 동안 세상이 너무 변해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새로운 연구주제와 생계를 함께 모색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이제까지 나름의 어려움을 돌파해 학위과정을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본격적인 고생길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고 나면 절망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정해진 길도 없고, 어렵게 길을 찾아 들어선들 어디까지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대학원에 갓 입학해서 <구운몽> 연구에 일생을 헌신하신 고() 석헌(石軒) 정규복(丁奎福) 선생님께 고전문헌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는데, 어린 필자의 눈에도 평생의 연구 주제를 은퇴 후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정규복 선생님을 비롯한 선대 학자들의 연구는 소장처에 있는 자료들을 찾는 수준이 아니라, 소장처들의 온갖 자료들을 정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시중의 고서들을 사재를 털어 구입, 기증하는 등 선대 학자들의 업적 덕분에 후대 학자들이 필요한 자료를 살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본 연구를 계속하는 필자에게 나이를 먹으면 지금의 연구가 힘들어 질 것이라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고전소설은 어지러운 필사(筆寫)로 이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으로 오래도록 연구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시력이 나빠진다. 나이가 들어 시력이 어두워지고 체력이 떨어져 발걸음까지 둔탁해지면 연구하기 어려운 분야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힘든 연구는 포기해야 옳을까? 만약 학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처음부터 학문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각자의 분야에서 무모하게 산을 넘고 강을 건넜기 때문에 오늘날에 이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 젊은 연구자들의 눈이 어둡고 발걸음이 무거워지더라도 영웅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운명을 개척해서 영원한 행복에 다다르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이유진 경희대학교 강사

고려대에서 이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조선후기 전란문학에 대한 연구를 수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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