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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가벼움(14)-평판] 오로지 타인의 감각경험이 나를 속일 때
[철학자의 가벼움(14)-평판] 오로지 타인의 감각경험이 나를 속일 때
  • 교수신문
  • 승인 2019.06.1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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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로 많은 인식의 오류를 범한다. 젊었을 때는 플라톤의 감각은 우리를 속인다는 말이 와 닿지 않았다. 앎의 밑바닥에는 감각의 도움이 없이는 제대로 된 인식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나름의 판단 때문이었다. 조국근대화를 위한 과학우선의 시대에 경험주의적 사고는 당시의 누구라도 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지식은 감각을 수반한다는 상식을 부정하는 플라톤은 해괴하게 보였다. 감각적으로 우리는 호랑이가 온다는 것을 안다. 눈이건, 귀건, 코건 동원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호랑이가 물면 아프다는 것은 물려보면 안다. 꼭 직접 물려봐야 아는 것도 아니다. 개가 물어도 아프니, 호랑이가 물면 더 아플 것이다. 나아가, 피가 나면 아프니, 피가 나는 물림이 아플 것은 뻔하다. 결국 지식은 감각경험의 종합일 수밖에 없는데도, 플라톤은 왜 그렇게 엉뚱한 소리를 한 것일까?

참다운 앎이라는 이상을 너무 높게 잡은 탓이다. 앎도 층차가 있다면, 플라톤의 앎은 최상의 앎이고 완벽한 앎이다. 내가 말하는 앎은 그저 상식적이고 평범한 앎일 뿐인데, 나의 시원찮은 앎으로 그런 고차원적인 앎을 탓한 것이다.

우리의 많은 논쟁이 바로 앎과 직결된다. 나는 호랑이로 봤는데, 남은 살쾡이란다. 나는 삵으로 보았는데, 남은 고양이란다. 나는 두 마리로 보았는데, 남은 한 마리란다. 나는 다가오는 것으로 보았는데, 남은 달아나는 것으로 보았단다. 이래서 감각이 어렵다. 그래서 결국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허무론에 빠지고 만다. 감각의 주관성을 권력의 맹목성으로 이기고자 하는 것이다.

이럴 땐 플라톤이 그립다. 그러나 플라톤이 벌여놓은 이러한 감각경험에 대한 불신은 칸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풀리기 시작하니, 그 엉뚱한 발상의 죄상은 참으로 오래되었다. 거기서 자유로웠던 영국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세계를 머리속에서만 인식하지 않고, 몸뚱이로 인식한 영국인들이었다. 영국인들을 이은 미국인들이 오늘날까지 세계를 제패하는 까닭도 이런 경험주의적 배경을 갖고 있으니, 철학적 발상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얼마 전 테니스를 치면서 내 종아리근육이 파열되는 소리를 나는 다른 공에 맞았다고 여겼지만, 그리고 테니스공보다는 야구공에 맞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것은 내 신체 속의 소리라서 남이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나의 경험을 비로소 객관화시킬 수 있었다. 나도 경기장에서 본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누가 나 때렸어?’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바로 발목 뒤의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경우였다. 뒤편에 앉아있던 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

소리 가운데에는 나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는 모양이다. 녹음기가 나왔을 때, 나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 같지 않은 것도 좋은 예다. 내가 듣고 있는 나의 목소리와 남의 듣고 있는 나의 목소리는 이렇게 다르다.

내가 아닌 남이 하는 소리도 있다. 평판(評判; reputation)은 나와는 무관하게 벌어진다. 좋을 때는 명성(名聲)이나 명망(名望)으로 불리지만 나쁠 때는 악평(惡評)이 된다. 호평에서 악평으로 바뀌는 것도 순식간이다. 신망(信望)이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 판단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바로 남이라는 점에서 평판은 오로지 타인의 감각경험이다. 플라톤식이라면 그것도 나를 속인다.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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