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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구한 '류성룡 리더십'은 없는가
이순신을 구한 '류성룡 리더십'은 없는가
  • 교수신문
  • 승인 2019.04.29 09: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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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의 시관 : 미래지향성 리더십

4월 28일 충무공 탄생 474주년을 맞아 교수신문은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가 최근 발표한 류성룡의 시관에 관한 논문을 요약해 싣습니다. 송 교수는 논문에서 "'적페청산'은 오늘날 이 정권의 화두이자, 이 정권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기에 충분하다"면서 "국민들이 생각하는 적폐는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오히려 더 새로운 적폐가 이 정권 들어 계속 쌓여져가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순신을 중용한 류성룡과 이순신을 죽이려한 선조의 이야기, 당시의 적폐 이야기를 징비록을 통해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류성용
류성용

류성룡의 삶과 그의 마지막 저작 징비록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희망이다. 징비록의 ‘징비’의 더 깊은 함의는 천찬(天贊)이다. 천찬은 바로 희망이다. 그것은 하늘이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그 하늘의 도움을 ‘절대 확신하는’ 희망이다. 임진왜란은 절대절망의 극한상황이다. 절망의 맨 끝, 도저히 헤어날 수도 일어설 수도 없는, 인력으로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앞이 막힌 상태가 절대절망이다. 그 절망의 극단에서도 절망은 없었다. 절통(切痛)은 해도 절망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징비록의 기록이고, ‘징비’의 또 다른 함의다. 그 희망이 소생의 원천이고, 국가재조, 즉 나라를 다시 만들고 일으키는 힘이었다.
그 희망이 과거를 털고 미래로 향하는 바로 미래지향성이었다. 어째서 류성룡은 절망하지 않았는가. 절망 말고는 아무것도 품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다른 조신들과 달리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까. 아니, 희망을 굳게 믿고 흔들림이 없었을까. 징비록에서 그 두 가지를 찾아낼 수 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찾을 수 있지만, 이는 모두 파생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것, 대본이 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류성룡의 유교적 신념이고, 다른 하나는 이순신이다. 바로 류성룡이 그에게 건 유일한 희망이다. 앞의 것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라면, 뒤의 것은 임진왜란을 바로 맞으면서다.
유교적 신념에서 희망은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 해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프로테스탄트라는 종교적 신앙에 기반한 것이고, 또 하나님을 굳게 믿는 사람들의 신념인 만큼, 오로지 그 믿음만으로 구원의 희망을 굳게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유교는 프로테스탄트와 같은 종교가 아니고, 그 윤리도 프로테스탄트 윤리처럼 신앙에 기반한 윤리도 아니다.
더구나 당시 사람들과 이웃해서 함께 믿는 불교의 열반이나 윤회사상에서 오는 내세의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유교에서의 윤리며 신념은 매일매일의 삶에 가반한 오직 생활윤리며 생활신념일 뿐이다. 거기서 종교적 신념으로서의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본원적으로 어려운 일이고, 더구나 일상생활이 완전히 무너진 생활세계의 파탄상태에서 종교도 아닌 유교가 구원의 희망을 불러일으킬 일은 더더욱 만무한 일이다.
당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명나라다. 명은 조선이 기댈 유일한 나라였고 명의 원병이 오직 일루의 희망이었다. 선조를 비롯해 조신들은 모두 거기에 목을 매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는 희망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절망이기도 하고 재앙이기도 했다. 그것은 나중 구원병으로 온 그들을 경험하고야 알았다. 명군이 와서도 희망은커녕 나라는 쑥대밭이 되었고, 임금은 여차하면 중국으로 귀화하려 했다. 군량은 다 떨어지고, 병사도 싸울 기력이 없고, 그런 병사마저 병기가 없었다. 상대는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 한 가닥 희망이었던 명군은 싸울 때마다 졌다. 그나마 싸울 의지도 의욕도 없었다. 가능하면 싸움을 회피하려고 했고, 싸우려는 조선군마저 싸움을 못하게 했다.
그들은 6·25때 원군으로 온 미군이나 유엔군과는 완전히 달랐다. 선조가 아무리 매달려도 그들은 남의 나라였다. 그들이 결코 희망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류성룡은 어떤 유교적 신념으로 흰망을 잃지 않았을까. 누구나 논어 맹자에서 ‘성인의 말씀’을 익히지만 누구나 성인의 말씀을 신념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인 공자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늘 희망을 내보였다.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려 하지 않는데 저들이 나를 어찌하겠느냐’ ‘하늘이 내게 선천적으로 덕을 주셨거늘 환퇴(桓?)가 나를 어찌 해칠 수 있겠는가’
당시 조선군, 명군을 다 합쳐 이순신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선조를 비롯한 조신들 중에서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도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진주성 대첩과 같은 유의 큰 이김으로만 생각했다. 그만큼 임진왜란에 대해 무지했다. 한산도 대첩은 한 성, 한 지역이 아니라 한 나라를 지키는 것이었고, 조선과 중국의 바다를 지키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해서 동아시아를 지키는 것이었다.

송복 교수
송복 교수

만일 한산대첩이 없었다면 왜군은 조선의 보루인 전라도를 점령하였을 것이고, 그리고 서해로 나아가 요동 연안의 대련과 금주, 복주, 천진 등이 위협을 받아 구원군이 조선으로 나올 수 없음은 너무나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이런 이순신을 죽이려고만 했다. 류성룡은 선조와 조정의 다른 군신들에게 ‘통제사는 이순신 아니면 안 됩니다. 이순신이 아니면 한산도를 지킬 수 없고, 한산도를 지키지 못하면 호남을 보전할 수 없습니다. 호남을 보전하지 못하면 나라는 어떠한 구실도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단호히 말하지만, 이런 류성룡을 경기도 순찰사로 내보낸 사이 선조는 어떻게든 이순신을 죽일 상소문을 올리라고 독촉한다. 그 명재경각의 순간에 노재상 정탁이 나서 겨우 이순신을 구명한다. ‘순신은 명장입니다. 죽여서는 안 됩니다. 군사상의 기밀의 이롭고 해로움은 전장과 멀리 떨어져 있는 조정에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순신이 나아가지 않았음은 반드시 생각하는 바의 깊은 뜻이 있어서일 겁니다. 청컨대 너그러이 용서하시어 훗날에 공을 이루도록 하소서.’
그렇게 해서 이순신은 살아났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 이 역시 ‘오 천찬-하늘이 도우샤’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스터리는 왜 선조는 그토록 이순신을 죽이려고 했고, 왜 다른 조신들은 이순신을 살리려고 하지 않았을까 이다. 당시 류성룡과 더불어 최고의 인물이라던 오리 이원익은 왜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나이가 밑이긴 하지만 가장 명민하고 기개가 있다던 백사 이항복, 한음 이덕형은 왜 가만히 있었을까. 그들도 원균과 마찬가지로 이순신에게서 희망을 보지 못했던 것인가.
그러나 징비록에서는 이순신이라는 이 유일의 희망이 400년 후 ‘오래된 미래’가 아닌 ‘새로운 미래’, ‘새로운 지평’으로 거듭나고 재천명될 것임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 할 것이다. ‘역사는/무덤가에서 희망을 찾지 말라지만/갈망의 파도가 솟구치면/희망과 역사는 함께 노래한다’는 어느 시인의 시귀처럼 징비록의 ‘징비’가 함의하는 ‘희망’도 이와 같을 것이다. 그 희망이 곧 류성룡의 미래지향성으로서의 리더십도 함께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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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19-04-30 02:41:13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 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 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됨. 최고 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 원)이 승계하였습니다. 한국의 Royal대는 국사에 나오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 그리고 교황윤허 서강대. http://blog.daum.net/macmaca/25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