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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문제와 저출산에 대한 문명사적 성찰: 김기봉 교수
한반도 문제와 저출산에 대한 문명사적 성찰: 김기봉 교수
  • 김기봉/경기대 사학과 교수
  • 승인 2019.04.1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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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봉/경기대 사학과 교수

 

김기봉/경기대 사학과 교수

합리적 계산 능력을 가진 인류는 어떤 유기체보다도 이기적 생명체이다. 이기적 개체는 이타적 개체를 이긴다. 하지만, 이기적 집단은 이타적 집단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인류는 이기적 개체들이 모여 가장 크고 강력한 이타적 공동체를 형성한 종이다. 인류가 그럴 수 있었던 요인은 국가, 민족, 공화국, 제국과 같은 정치공동체에 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본성적으로 폴리스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폴리스 안에서만 자신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고,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폴리스라는 것이 과연 실제로 있는 실체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다른 개체와 소통하고 의견을 조율하며 선한 일을 실천할 수 있는 이성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폴리스는 공동의 공간을 창조하고, 거기서 개체적 존재의 의미를 실현하는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고 했다. 

개체가 타자와 관계를 맺으려는 특성을 사교성(sociability)이라 칭한다. 문화인류학자 로빈 던바는 원숭이나 침팬지 같은 영장류들을 대상으로 사교성 연구를 했다. 연구를 통해 신피질 크기가 영장류의 그룹 규모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복잡한 사고를 담당하는 대뇌 영역인 신피질이 클수록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개체의 수가 많아진다. 인간의 경우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임계치가 일반적으로 150명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150을 ‘던바의 수’라고 부른다. 페이스북과 같은 SNS에서도 최적의 친분관계를 맺을 수 있는 한계가 대체로 150명이다. 
인간은 친구가 아닌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집단을 형성하여 운명 공동체로 살아간다. 올림픽에는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참가한 수천 명의 선수가 국가의 명예를 걸고 시합을 벌이고, 어떤 경기 종목에는 몇만 명이 경기장에 운집하여 자국 선수를 열렬히 응원한다. 이런 평화의 제전을 벌일 수 있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그러다가도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수백만 명이 동원되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싸운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허구서사를 매개로 해서 신과 같은 초월적인 대상과 연결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했다. 인류가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점은 현실과 허구의 두 세계를 산다는 점이다. 인류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허구로 만들어내면서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특이한 종이다. 
이렇게 인간이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생물학적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문화라는 인간 특유의 삶의 세계를 구축하게 만들었다. 문화란 인간 스스로가 짠 의미의 거미줄이다. 그런 의미의 거미줄은 실재가 아닌 허구지만, 상상의 질서를 만들어내서 150명을 초과하는 거대한 협력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런 상상의 거대한 협력공동체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 종교와 국가다. 근대 이전에는 종교가 국가보다 강력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근대 이후에는 국가가 권력의 ‘블랙홀’처럼 작동한다. 국가의 힘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는 때는 전쟁이다. 국가 간의 전쟁에서 개인은 전혀 모르는 사람을 단지 적국의 군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살해하고, 그런 살인을 많이 할수록 영웅으로 칭송을 받는다. 왜 이런 난센스가 벌어지는가?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하나뿐인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되며, 호국영령으로 숭배를 받는다. 결국 국가를 신격화할 때 이런 정치종교가 가능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가라는 인조신(人造神)은 절대적으로 선하며 영원한가? 한국 현대사에서 독재정권 시기에 자행된 국가 폭력의 사례도 적지 않으며, 20세기에도 하루아침에 사라진 국가도 여럿 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몇 나라만 열거하면 소련, 동독,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있다. 이들 나라는 왜 없어졌는가?
가장 불가사의한 일이 소련의 멸망이었다. 소련은 지구상에서 미국과 함께 핵무기를 가진 가장 강력한 국가였는데도 스스로 해체를 선언했다.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처럼 서로 다른 여러 민족을 하나의 상상의 정치공동체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고 계급만이 있다고 가르쳤던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기 때문이다. 그런 허구서사가 과학이 아니라 허위의식임이 드러났을 때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소련이 멸망했어도 국가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국가 없는 개인은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부모 없는 고아는 살 수 있어도 국적 없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기본 권리를 누릴 수 없다. 소련이 가졌던 유산 대부분을 러시아라는 국가가 물려받았다. 소련에서 러시아로 국가의 계보가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가 사라지지 않고 이어졌기 때문이다. 땅과 사람들이다. 땅이 국가라는 ‘인조신’이 거할 수 있는 장소라면, 사람들은 법전 형태의 세속 성경에 적혀있는 것을 교리로 따라야 하는 신자들이다. 

“대한민국이 위험하다”는 말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대한민국 위기론은 무엇보다도 국가를 형성하는 두 요소인 땅과 사람들에서 심각한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는 것에서 기인한다. 21세기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다. 북한은 세계적으로 가장 가난한 국가지만 핵으로 불장난을 벌일 때 인류 전체의 안녕과 평화를 위협하는 그야말로 ‘악의 축’이 될 수 있다. 만약 미국과 중국이 패권 경쟁을 벌이는 신냉전 시대 전쟁이 발발한다면 그 장소는 한반도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가 냉전 시대 38선을 경계로 남북을 분단시켰고, 한국전쟁을 일어나게 했다.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와 더불어 대한민국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위험요인으로 지적되는 것이 저출산을 통한 인구감소다. 지정학적 위치가 운명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저출산은 한국인들의 집단적 선택의 결과다. 누구는 저출산은 한국인의 ‘국가적 자살’이라고까지 말한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목숨인데, 그 목숨을 스스로 끊는 행위가 자살이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상실할 때 자살을 생각한다. 물론 타자와 공동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에밀 뒤르켐이 말하는 ‘이타적 자살’도 있다. 이기적 집단자살이든 이타적 집단자살이든 저출산은 한국인을 지구상에서 서서히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땅과 사람들이라는 두 요인 모두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은 과연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는가? 우리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어쩌면 지금 우리는 유구한 한국사에서 가장 부강하고 세계에서 위상이 가장 높은 국가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해외여행을 가보면 한국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힘이 한국인들에게 있다는 것이 세계가 한국을 경이로운 국가로 바라보는 이유다. 그런데 그 국가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을 형성하는 핵심 요인인 땅과 사람들에 중대한 위기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핵전쟁으로 한순간에 원시시대로 퇴보할 수 있는가 하면, 인구의 감소로 국가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 전체를 살펴볼 때, 한국사의 운명을 결정했던 첫 번째 요인은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다. 프랑스의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지리를 “움직이지 않는 역사”라고 했다. 사람은 왔다가 사라지지만, 지리는 영속해서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활과 운명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인 한반도가 지리적으로 결정한 우리 역사의 운명은 무엇인가? 이런 지리법칙에 따라 전 지구의 역사를 조망했던 팀 마샬은 한마디로 풀 수 없는 ‘문제’라고 했다. 

외교가에서는 “친구를 선택할 수 있어도 이웃은 선택할 수 없다”는 말을 한다. 누가 이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지리다. 한반도의 이웃은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다. 그렇다면 친구는 누구인가? 남한에게는 미국, 북한에게는 중국이다. 그렇다면 남한과 북한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웃도 친구도 아니다. 이 둘이 다시 결합할 수 있을 것인가? 재결합이 어렵더라도 다시 전쟁을 벌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 

현재 한반도 문제의 뇌관은 북한 핵이다. 북한에게 핵무기는 내부적으로는 체제의 감옥을 강화하는 ‘창살’의 효과를 발휘하는 동시에 외부적으로 봉쇄를 풀기 위한 열쇠로 사용된다. 한편으로는 내부를 단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를 향해 빗장을 푸는 무기로 활용되는 북한 핵은 모순덩어리다. 한반도 비핵화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이상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북한의 완전하고도 비가역적인 비핵화를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 딜레마다. 이런 모순이 국제사회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보게 만든다. 

정치란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지정학적 운명으로 주어진 한반도 문제를 푼다는 것은 정치가들에게는 ‘미션 임파서블’로 보인다. 하지만 그 난제를 푸는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지도자가 나올 때 ‘한반도 운전자론’이 현실이 될 수 있다. 그런 지도자는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행운의 여신인 ‘포르투나(Fortuna)’를 잡는 ‘비르투(Virtu)’를 가진 정치인이다. 

하나의 유령이 한국사회를 떠돌고 있다. ‘저출산’이라는 유령이. 합계출산율이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다가 2018년에는 마침내 연간기준 0명대로 떨어졌다. 기근이나 전쟁이 일어나지 않앗는데 이런 일이 생긴 전례는 인류 역사상 없었다. 한 나라의 인구가 유지되려면 합계출산율이 2.1명은 돼야 하는데, 이런 추세라면 장차 한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공포의 시나리오는 이미 2006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인구문제연구소 데이비드 콜먼에 의해 나왔다. 그 충격파로 <2065 한반도가 사라진다>라는 책이 나오기도 했다. 

국가가 몸이라면 역사는 정신이고, 일제강점기처럼 비록 몸을 빼앗겨도 정신만 잃지 않으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역사를 기억하는 국민이 없다면, 나라는 소멸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지금의 저출산 현상은 한국인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할 만큼 심각한 재앙인가?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현재를 반성하는 역사는 문제를 시간 속에서 성찰하게 만든다. 불과 50년 전 가족계획운동과 산아제한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던 때는 한반도의 인구폭발이 가져올 불행에 대해 걱정했다. 1960년대에는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면한다.”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잇었고, 1970년대에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유행했다. 현재는 과거로부터 기원한다. 그렇다면 과거의 가족계획운동 덕분에 현재의 우리는 거지꼴을 면했으며, 그 대가로 이번에는 정반대로 저출산 때문에 국가가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여야 하는가? 아니면 인구정책에서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는가? 

저출산에 대한 공포 시나리오는 일반적으로 현재의 문명 조건을 기준으로 미래의 인구 감소가 초래할 위험성을 경고하는 플롯으로 짜진다. 2065년에 한반도가 사라진다고 예상하는 사람은 50년 후에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한국인들의 정체성이 규정되고 남북이 분단된 상태가 지속된다는 전제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지구촌의 사람들이 교류하면서 이주하는 글로벌 시대 다문화 사회에서 미래의 한국인이 누구일지는 현재의 우리 기준으로 말할 수 없다. 장차 한국사회에는 이주해 들어온 사람들과 이중 국적을 갖고 왔다 갔다 하는 경계인들이 매우 많아질 것이 분명하다. 

인류는 본래 아프리카에서 탄생하여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전 지구로 이동해 거주하는 ‘이주하는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미그란스(homo migrans)’라고도 불린다. 오늘날 우리는 해외로 나가기 위해서는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 여권은 국가가 자국민에게 외국에 여행할 수 있는 자격을 증명하는 서류로서, 이는 여행의 권리를 보장하는 문서가 아니라, 한 인간을 한 국가의 인구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생체권력의 효과를 발휘한다. 근대 국가는 여권을 발행해서 ‘이주하는 인간’의 본성을 통제했다. 

이런 근대 국가의 인구 밖으로 벗어나 여권 없이 자기 나라를 탈출한 사람들을 난민이라고 부른다. 국적 없는 사람이 됨으로써 거주 이동의 자유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난민이라고 부른다. 국적 없는 사람이 됨으로써 거주 이동의 자유를 갖지 못하는 난민은 역설적이게도 인류의 조상들처럼 ‘이주하는 인간’으로 복귀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오늘날 난민 문제는 어느 한 국가가 해결할 수 없는 초국가적 문제이다. 한국도 난민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전 지구적으로 보면 인류는 ‘인구 폭발’을 걱정해야 하지만, 한국은 ‘인구절벽’의 공포에 휩싸여 있다. 이런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은 인류가 다시 ‘이주하는 인간’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별로 없다. 

앞으로 인류 문명의 존망에 가장 큰 변수가 될 거라고 지적하는 것이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은 인류가 만든 최고이자 마지막 발명품이 될 거라고도 말한다. 많은 인공지능 전문가들은 앞으로 50년 후에는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범용인공지능(AGI)이 출현할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범용인공지능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실적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의 많은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고, 그때는 로봇세를 도입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런 시대에도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인구통계를 작성할 것인가? 

인구통계가 인간이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미래의 사실이라는 전제에 입각한 인구학은 결정론의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다. 인구는 정해진 사실이지만, 인간의 미래는 열려있다. 인간에게 미래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기 말하는 것처럼 불확실하다. 불확정성 원리는 위치의 측정이 운동량을 변화시키고, 반대로 운동량의 측정이 위치를 변화시켜 오차를 증가시키기 때문에 불확실성이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인구정책이 저출산이라는 정반대의 인구변동을 초래한 이유로 불확정성 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 인구의 위치를 알기 위해 인구통계를 작성한다. 인구통계는 미래에 발생할 인구 변동을 예측할 목적으로 현재의 인구 위치를 측정한다. 그런 인구통계를 통한 관찰은 인구의 운동량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가 인구정책이라는 개입으로 증폭되면서 고출산이었던 인구가 저출산으로 역전된 것이 지금 현재 벌어진 상황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인구 그 자체는 ‘정해진 미래’일지언정 인간이 만드는 미래는 불확정적이다. 

이런 불확정성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시공간의 인식지평을 넓혀서 인구문제를 보는 문명사적 조망을 해야 한다. 21세기 한반도 문명사가 어디로 갈 것인가? 첫 번째, 시간의 측면에서는 “저출산, 이또한 자나가리라”라는 믿음을 갖고 천천히 서두른다는 마음가짐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구는 노력을 해야 한다. 두 번째, 공간의 차원에서는 글로벌 시대와 디지털 문명의 도래를 통해 확장되는 인간 삶의 공간에 대한 고찰을 해야 한다. 

근대국가의 인구 개념은 영토의 확정성을 전제로 했다. 하지만 글로벌 시대에 인류 삶의 무대는 전 지구로 확대되고, 디지털 문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상 세계로 인간의 거의 모든 활동을 확장한다. 또한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는 통일 시대를 대비하여 남한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공간으로 하는 미래 기획도 세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가상세계로 인간 삶의 무대가 점점 더 옮겨가는 흐름과 연관해서 적정 인구수에 대한 새로운 계산도 할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이 오프라인에서만 생활할 때와 온라인을 통해 전 세계인과 연결되는 삶을 살 때의 적정인구수는 같을 수 없다. 

한반도라는 땅은 오프라인이다. 오프라인은 ‘지리의 감옥’이지만, 온라인은 무한정으로 넓은 우주다. 지금가지의 한국사는 한반도라는 지리의 감옥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으로 전개됐다. 미래의 한국사는 달라질 전망이다. 미래 문명은 땅과 인구로부터 해방되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땅과 인구에 입각하면 대한민국은 ‘정해진 미래’를 살지만, 그것을 벗어나는 상상력을 펼치면 ‘만드는 미래’를 열 수 있다. 

신은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창조하지만, 인간은 ‘있는 것’으로부터 ‘없는 것’을 상상해 냐는 능력으로 ‘결핍존재’로서의 자연적 한계를 극복해 왔다. 인간은 상상력의 나래를 펴는 것으로 현실 감옥을 탈출한 유일한 생명체다. 2019년은 3·1운동을 통해 민주공화국의 나래를 펼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올해가 대한민국이 한반도라는 ‘지리적 감옥’에서 벗어나 세계를 향해 웅비하는 꿈을 현실로 실현하는 전기가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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