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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④-4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을 찾다
최재목의 무덤기행④-4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을 찾다
  •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9.04.16 1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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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네코 후미코, 7년간 ‘부강’ 생활로 조선의 ‘인간’을 만나다
가네코 후미코가 살았던 부강리 집의 현재 모습.
가네코 후미코가 살았던 부강리 집의 현재 모습.

 

1) 학대와 불운에서 나 자신을 찾다

국가권력에 대한 회의’, ‘위안 없는 사유

세상의 갑질, 그 놈의 잔소리와 간섭을 벗어나 다 때려치우고 훌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조미아(Zomia)처럼, 국가 권력을 피해 산악지대에서 사는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처럼 살고 싶을 때가 있다. 이렇게 국가와 권력을 회의하며, 지배받지 않으며 위안 없는 사유를 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율과 자유 때문이다.

가네코 후미코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나는 오래 전 읽었던 박홍규의 까뮈를 위한 변명(우물이 있는 집, 2003)을 생각해냈다.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전체주의나 국가주의를 거부한 까뮈(1913-1960). 그는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았다. 그러나 박홍규의 말대로 그는 처음부터 알제리라는 식민지 상황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것은 한갓 소설의 배경일 뿐이다.” 그에게는 식민지나 프랑스나 어디나 마찬가지로 지겨운, 부조리한 현실, 구역질나는 세상일 뿐이었다(23). 까뮈는 식민주의를 거부했으나 식민지 알제리의 독립은 끝까지 반대했다. 그래서 박홍규는 까뮈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식민주의를 거부했다.그러나 식민지로부터 유럽인을 쫓아내고 아랍인만의 독립된 권력국가를 세우는 것에 반대했다. 말하자면 일제하 일본인들을 쫓아내지 않고 조선 땅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사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것이 까뮈의 생각이었다”(37-38) 그러나 까뮈가 중요한 이유를, 박홍규는 아무런 위안 없는 정치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어떤 보장 없는 정치이론을 보여준다는 점이라 하였다. 이런 정치이론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한나 아렌트인데, “어쩌면 까뮈는 그녀의 선구자였다고 본다. 까뮈나 아렌트는 과학, 이성에 기대를 건 계몽주의 대한 믿음을 비판하고, 아울러 그런 계몽주의에서 비롯한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비판했다고 한다(280-1쪽 참조). 국가/권력에 대한 회의’, ‘위안 없는 사유가 가서 닿는 곳은 자율적이고 아나키적인 정치활동과 조직’(281)일 것이다.

이런 사유를 가진 사람들은 유기적인 삶이 아니라 프리랜스의 삶을 원한다. 가네코도 이런 길을 택했다. 다만 식민지에 대한 관점은, 가네코와 까뮈가 달랐다. 예컨대 가네코의 사유 속에, ‘조선 땅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사는 새로운 공동체같은 것은 없었다. 조선은 조선이고, 일본은 일본이었다. 그녀의 목적은, 일본 제국그리고 그 권력=폭력의 발원지인 천황제와 대결하고 그것을 제거하는데 있었다.

 

자발적 복종과 저항

먹고살기 위해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얼마나 복종하는가. 습관적으로 돈에, 명예에, 권력에, 권위에, 종교에, 패거리-집단에, 세속적 가치에, 외국산 명품에. 아예 거기다 몸을 갖다 바치기 일쑤다. 아니, 그것의 노예가 되어 함께 따라 죽는 경우도 허다하다. 자발적으로 순장(殉葬)’하는 것이다.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함을 알지 못하고, 무지하게 스스로 그곳에다 자기 무덤을 파댄다. 그러다가 아무 저항 없이, 거기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서 그냥 그렇게 편히 묻힌다. 타고나 자신의 자유로운 본성을 상처투성이로 만들면서 명예와 이익[名利]에다 몸뚱이를 순장시키고 마는[傷性以身爲殉] 세속의 흔해 빠진 삶들이란 잘났건 못났건 결국 거기서 거기라며, 일찍이 장자(莊子)는 꼬집었다.

이런 대목에 서면, 나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목록을 자유로 보고 자발적 복종의 악습을 예리하게 파헤치며 배격한 라 보에시(1530-1563)를 떠올린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굴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유의 맛을 알고, 그것을 적극 찾아 나서서 저항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한편, 익숙한 현실의 명령과 지시 체계 속에서, 매사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prefer not to)”라고 말하는, 필경사(筆耕士) 바틀비의 무위(無爲)와 고요의 저항법도 적극적 거부 못지않은 저항이라 생각한다.

 

학대와 불운에서 나 자신을 찾다

가네코는 학대와 불운에서 나 자신을 확립한다. 그렇게 나 자신이란 인간을 찾을 수 있게 한 모든 불행한 운명, 학대에 대해, 그녀는 감사한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뒤, 도쿄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며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불행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요코하마에서, 야마나시에서, 조선에서, 하마마쓰에서, 나는 줄곧 학대당했다. 나는 자신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모든 과거에 감사한다. 나의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게도, 외삼촌에게도, 이모에게도. 아니, 내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고, 가는 곳마다 모든 환경 속에서 학대받을 만큼 학대받은 나의 운명에 감사한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나의 아버지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집에서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다면, 아마 나는 내가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성격,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에는 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불운한 탓에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조정민 옮김, 나는 나: 가네코 후미코 옥중수기, 238)

 

2) 조선의 부강체험, 사회주의 사상으로 이어지다

일본인,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증오

그가 자신을 자각하는 체험 중에 중요한 것이 조선의 부강 생활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외할아버지 가네코 도미타로의 5녀로 입적(入籍)되어, 아버지의 누이(고모) 가메가 시집간 이와시타가에 맡겨져 충청북도 청주군[이후 청원군 소속이었다가 최근 세종시로 변경됨]의 부용면 부강리에 가서 살게 된다. 이곳에서의 체험이 그녀의 삶과 사상 형성에 큰 역할을 한다. 그 핵심은 일본인,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증오심의 형성이다.

그녀는 부강 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 도쿄 생활을 하면서 부강소학교 재학 당시 가난했기에 도움을 받기도 했던 은사 핫토리 도미에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가운데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일본인이긴 하지만 일본인이 너무 증오스러워 화가 치밀곤 합니다. 그때 그저 눈에 비쳤을 뿐인 사건들이 지금은 크나큰 반항의 뿌리가 되어 제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조선 생활 동안 보고들은 바 저는 조선인들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모든 반항운동에 동정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쿄로 오자마자 많은 조선인 사회주의자 혹은 민족운동자와 벗이 되었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이런 운동을 속편하게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해 버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작년 4월부터 조선인인 허무주의적 아나키스트와 동거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보내드린 현사회(現社會)는 우리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만들고 있습니다.“(야마다 쇼지, 앞의 책, 350)

 

그녀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조선인들의 모든 반항운동에 동정심을 갖게 되고, 조선인 사회주의자 혹은 민족운동자들과 벗이 되어가고 있으며,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과의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위의 편지 구절은 가네코가 체험한 7년간의 부강생활이 일본인-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증오는 물론 조선의 인간’, 아울러 운명적 동지 박열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음을 요령 있게 압축하고 있다.

 

부강체험: ‘에게로 연결된 동포의식

가네코가 조선의 부강에서 체험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여기서는 우선 주요한 것만 언급해두기로 한다.

먼저 그녀의 부강체험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에게서 느낀 동포의식이다.

부강을 떠나 일본의 야마나시에 있는 외가로 다시 갔을 때, 외삼촌이 키우는 개를 데리고 주변을 산책하면서 그녀는 이런 회상을 한다.

 

문득 조선의 고모네가 기르던 개가 떠올랐다. 그 춥고 추운 조선의 겨울밤에, 멍석 하나 없이 밖에서 잠자던 개가 생각났다. 내가 배곯고 집 밖으로 쫓겨났을 때, 마치 나의 고통과 슬픔을 알기라도 하는 듯 꼬리를 흔들거나 고개를 떨어뜨리고 콧소리를 내며 나에게 다가오던 개가 떠올랐다. 그때 내가 개의 목을 꼭 붙들고 껴안으며 혼자 소리 죽여 울던 것도, 그리고 밤에 몰래 나가 개에게 멍석을 깔아주었던 일도 또 어릴 적, 아버지에게 찔려 죽은 가여운 개의 죽음도./조선에 있었을 때 나는 나와 개를 항상 연결 지어 생각했다. 우리 둘 모두 학대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가장 딱한 동포라는 생각까지 했다.”(조정민 옮김, 같은 책, 183)

 

가네코의 옥중수기에는, 부강 시절 할머니에게 쫓겨나서 어린 그녀가 만주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눈과 모래가 섞여 가차 없이 얼굴과 다리를 때리는춥고 추운 조선의 겨울밤을 지새우는 장면이 나온다(조정민 옮김, 같은 책, 104). 쫓겨난 그녀와 함께 밤을 지새운 따스한 개. 그 개보다 못한 차디 찬 할머니=일본인이 그녀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부강체험: ‘머슴 고씨박대에 대한 분노감

이어서 가네코는, “내 경험을 이야기 하자니 머슴 고씨가 생각난다.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쓰지 않으면 미안한 마음이 들 것 같다.”고 하여 제법 길게 부강에서 사는 동안 체험했던 조선인 머슴 고씨에 대한 박대, 그에 대한 그녀의 분노감을 솔직히 또렷이 적어두었다.(조정민 옮김, 위의 책, 106-109쪽 참조) 그 내용은 이렇다: 이와시타가에는 고씨 성을 가진 머슴이 있었다. 머리가 좋지 않았으나 정직하고 일도 잘했다. 이와시타가는 그를 다른 집보다 싼 급료를 주고 고용하고 있었다. 아내와 세 아이를 거느린 그 가족은 늘 가난을 면치 못했다. 그들은 배불리 밥 한 번 못 먹고, 한겨울에도 쌀가마니 속에 들어가 오들오들 떨며 지냈다. 어느 날 고씨는 옷을 빨아야 한다며 하루 동안만 좀 쉬게 해달라 간청했다. 가네코의 할머니와 고모도 그 뜻을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놀리듯이 계속 말을 되풀이하게 하자, 고씨는 입을 옷이 없어서, 빨래가 마르는 동안 벌거벗은 채 떨고 있을 수 없으니 이불을 두르고 있어야 합니다.”라는 비참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런데도 가네코의 할머니와 고모는 낄낄대며 웃기만 하였다. 이 광경을 보고, 가네코는 말했다: “아아. 한쪽은 악의적인 장난, 다른 한쪽은 간절함. 이 대조적인 풍경이란. 어린 나였지만, 아니 어렸기 때문에 나는 정의감에 사로잡혀 할머니와 고모에 대해 지금까지 없던 분노를 느꼈다.”

 

부강체험: 3.1운동 목격, 반역적 기운을 느끼고 감격

마지막으로, 부강의 체험 가운데 사상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지역민들의 3.1운동을 목격하고, 일본인들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역적 기운을 느끼고, 감격하는 대목이다.

야마다 쇼지는 말한다. “가네코가 가장 깊은 동정을 드러냈으며, 그녀의 인상에 가장 깊이 남은 것은 19193월의 ‘3.1운동이었던 듯하다.”(정선태 옮김, 앞의 책, 53) 이어서 야마다는 당시의 노인의 증언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 “부강 최노인의 최상에 따르면 이곳에서도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것을 제지하려는 헌병이 말을 타고 여러 마을들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조선인들은 밤이 되면 산으로 올라가 횃불에 불을 붙이고 만세를 외쳤다. 그런 일이 4, 5일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부용면에서는 41일에도 산상 봉화시위가 있었다.”(같은 책, 같은 곳)

옥중수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가네코는 3.1운동에서 참가한 경험을 재판기록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 “조선인들이 지니고 있는 사상 중에서 일본인에 대한 반역적 정서만큼 제거하기 힘든 것은 없을 것입니다. 1919년에 있었던 조선의 독립 소요 광경을 목격한 다음 나 자신에게도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으며, 조선쪽에서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습니다.”(같은 책, 같은 곳에서 재인용)

 

가난-반감-반항심-동정심에서 사회주의사상으로

조선에서 체험한 것은 위의 ①∼③ 외에도 고리대금업 등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을 목도하면서 가네코는 조선인들이 불쌍하게 억압당하고, 고통받고, 착취당하는것에 한없이 동정심을 갖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겪어오면서 느낀 감정들이 정당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줄’ ‘사회주의/사상에 접하면서 불이 붙는다’.

 

사회주의는 나에게 특별히 새로운 것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겪어오면서 느낀 감정들이 정당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줄 뿐이었다. 나는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하다. 그 때문에 나는 돈을 가진 자로부터 혹사당하고 괴롭힘을 받았으며 들볶였고 억압당했다. 또한 자유를 빼앗겼으며 착취당하고 지배당했다. 이런 나는 힘을 가진 자들에 대해 항상 마음속 깊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진심으로 동정했다. 조선의 할머니 집 하인 고씨를 동정했던 것도, 불쌍한 개마저 동지처럼 느꼈던 것도 그 외에 이 수기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할머니 주위에서 일어난 많은 일에서 억압당하고 고통받고 착취당하는 불쌍한 조선인에 대해 한없이 동정했던 것도 이러한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던 반항심과 동정심은 순식간에 사회주의 사상에 의해 불이 붙어버렸다./아아, (중략) 우리와 같은 불쌍한 계급을 위해, 나의 모든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투쟁하고 싶다.//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어떻게 이러한 정신을 살려갈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무력했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그에 대한 준비도 단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불평, 불만, 반항심만 가득한 일개 반항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조정민 옮김, 앞의 책, 300)

 

가네코는 가난반감반항심동정심사회주의사상의 경로를 밟으며 이곳까지 왔다. ‘불평, 불만, 반항심만 가득한 일개 반항아가 사회주의/사상에 이론화되어 투쟁심을 기른다. 그런데 그녀는 과연 사회주의에 대해 어떤 믿음거리를 갖고 있었을까. 일본인에 대한 반항심과 조선인에 대한 동정심이 국가권력에 대한 회의를 거쳐, ‘위안 없는 사유아나키즘으로 나아가는 길목이 사뭇 궁금해진다.

 

 

 

1) 학대와 불운에서 나 자신을 찾다

국가권력에 대한 회의’, ‘위안 없는 사유

세상의 갑질, 그 놈의 잔소리와 간섭을 벗어나 다 때려치우고 훌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조미아(Zomia)처럼, 국가 권력을 피해 산악지대에서 사는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처럼 살고 싶을 때가 있다. 이렇게 국가와 권력을 회의하며, 지배받지 않으며 위안 없는 사유를 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율과 자유 때문이다.

가네코 후미코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나는 오래 전 읽었던 박홍규의 까뮈를 위한 변명(우물이 있는 집, 2003)을 생각해냈다.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전체주의나 국가주의를 거부한 까뮈(1913-1960). 그는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았다. 그러나 박홍규의 말대로 그는 처음부터 알제리라는 식민지 상황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것은 한갓 소설의 배경일 뿐이다.” 그에게는 식민지나 프랑스나 어디나 마찬가지로 지겨운, 부조리한 현실, 구역질나는 세상일 뿐이었다(23). 까뮈는 식민주의를 거부했으나 식민지 알제리의 독립은 끝까지 반대했다. 그래서 박홍규는 까뮈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식민주의를 거부했다.그러나 식민지로부터 유럽인을 쫓아내고 아랍인만의 독립된 권력국가를 세우는 것에 반대했다. 말하자면 일제하 일본인들을 쫓아내지 않고 조선 땅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사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것이 까뮈의 생각이었다”(37-38) 그러나 까뮈가 중요한 이유를, 박홍규는 아무런 위안 없는 정치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어떤 보장 없는 정치이론을 보여준다는 점이라 하였다. 이런 정치이론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한나 아렌트인데, “어쩌면 까뮈는 그녀의 선구자였다고 본다. 까뮈나 아렌트는 과학, 이성에 기대를 건 계몽주의 대한 믿음을 비판하고, 아울러 그런 계몽주의에서 비롯한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비판했다고 한다(280-1쪽 참조). 국가/권력에 대한 회의’, ‘위안 없는 사유가 가서 닿는 곳은 자율적이고 아나키적인 정치활동과 조직’(281)일 것이다.

이런 사유를 가진 사람들은 유기적인 삶이 아니라 프리랜스의 삶을 원한다. 가네코도 이런 길을 택했다. 다만 식민지에 대한 관점은, 가네코와 까뮈가 달랐다. 예컨대 가네코의 사유 속에, ‘조선 땅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사는 새로운 공동체같은 것은 없었다. 조선은 조선이고, 일본은 일본이었다. 그녀의 목적은, 일본 제국그리고 그 권력=폭력의 발원지인 천황제와 대결하고 그것을 제거하는데 있었다.

 

자발적 복종과 저항

먹고살기 위해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얼마나 복종하는가. 습관적으로 돈에, 명예에, 권력에, 권위에, 종교에, 패거리-집단에, 세속적 가치에, 외국산 명품에. 아예 거기다 몸을 갖다 바치기 일쑤다. 아니, 그것의 노예가 되어 함께 따라 죽는 경우도 허다하다. 자발적으로 순장(殉葬)’하는 것이다.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함을 알지 못하고, 무지하게 스스로 그곳에다 자기 무덤을 파댄다. 그러다가 아무 저항 없이, 거기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서 그냥 그렇게 편히 묻힌다. 타고나 자신의 자유로운 본성을 상처투성이로 만들면서 명예와 이익[名利]에다 몸뚱이를 순장시키고 마는[傷性以身爲殉] 세속의 흔해 빠진 삶들이란 잘났건 못났건 결국 거기서 거기라며, 일찍이 장자(莊子)는 꼬집었다.

이런 대목에 서면, 나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목록을 자유로 보고 자발적 복종의 악습을 예리하게 파헤치며 배격한 라 보에시(1530-1563)를 떠올린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굴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유의 맛을 알고, 그것을 적극 찾아 나서서 저항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한편, 익숙한 현실의 명령과 지시 체계 속에서, 매사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prefer not to)”라고 말하는, 필경사(筆耕士) 바틀비의 무위(無爲)와 고요의 저항법도 적극적 거부 못지않은 저항이라 생각한다.

 

학대와 불운에서 나 자신을 찾다

가네코는 학대와 불운에서 나 자신을 확립한다. 그렇게 나 자신이란 인간을 찾을 수 있게 한 모든 불행한 운명, 학대에 대해, 그녀는 감사한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뒤, 도쿄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며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불행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요코하마에서, 야마나시에서, 조선에서, 하마마쓰에서, 나는 줄곧 학대당했다. 나는 자신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모든 과거에 감사한다. 나의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게도, 외삼촌에게도, 이모에게도. 아니, 내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고, 가는 곳마다 모든 환경 속에서 학대받을 만큼 학대받은 나의 운명에 감사한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나의 아버지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집에서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다면, 아마 나는 내가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성격,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에는 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불운한 탓에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조정민 옮김, 나는 나: 가네코 후미코 옥중수기, 238)

 

2) 조선의 부강체험, 사회주의 사상으로 이어지다

일본인,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증오

그가 자신을 자각하는 체험 중에 중요한 것이 조선의 부강 생활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외할아버지 가네코 도미타로의 5녀로 입적(入籍)되어, 아버지의 누이(고모) 가메가 시집간 이와시타가에 맡겨져 충청북도 청주군[이후 청원군 소속이었다가 최근 세종시로 변경됨]의 부용면 부강리에 가서 살게 된다. 이곳에서의 체험이 그녀의 삶과 사상 형성에 큰 역할을 한다. 그 핵심은 일본인,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증오심의 형성이다.

그녀는 부강 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 도쿄 생활을 하면서 부강소학교 재학 당시 가난했기에 도움을 받기도 했던 은사 핫토리 도미에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가운데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일본인이긴 하지만 일본인이 너무 증오스러워 화가 치밀곤 합니다. 그때 그저 눈에 비쳤을 뿐인 사건들이 지금은 크나큰 반항의 뿌리가 되어 제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조선 생활 동안 보고들은 바 저는 조선인들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모든 반항운동에 동정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쿄로 오자마자 많은 조선인 사회주의자 혹은 민족운동자와 벗이 되었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이런 운동을 속편하게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해 버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작년 4월부터 조선인인 허무주의적 아나키스트와 동거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보내드린 현사회(現社會)는 우리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만들고 있습니다.“(야마다 쇼지, 앞의 책, 350)

 

그녀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조선인들의 모든 반항운동에 동정심을 갖게 되고, 조선인 사회주의자 혹은 민족운동자들과 벗이 되어가고 있으며,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과의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위의 편지 구절은 가네코가 체험한 7년간의 부강생활이 일본인-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증오는 물론 조선의 인간’, 아울러 운명적 동지 박열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음을 요령 있게 압축하고 있다.

 

부강체험: ‘에게로 연결된 동포의식

가네코가 조선의 부강에서 체험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여기서는 우선 주요한 것만 언급해두기로 한다.

먼저 그녀의 부강체험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에게서 느낀 동포의식이다.

부강을 떠나 일본의 야마나시에 있는 외가로 다시 갔을 때, 외삼촌이 키우는 개를 데리고 주변을 산책하면서 그녀는 이런 회상을 한다.

 

문득 조선의 고모네가 기르던 개가 떠올랐다. 그 춥고 추운 조선의 겨울밤에, 멍석 하나 없이 밖에서 잠자던 개가 생각났다. 내가 배곯고 집 밖으로 쫓겨났을 때, 마치 나의 고통과 슬픔을 알기라도 하는 듯 꼬리를 흔들거나 고개를 떨어뜨리고 콧소리를 내며 나에게 다가오던 개가 떠올랐다. 그때 내가 개의 목을 꼭 붙들고 껴안으며 혼자 소리 죽여 울던 것도, 그리고 밤에 몰래 나가 개에게 멍석을 깔아주었던 일도 또 어릴 적, 아버지에게 찔려 죽은 가여운 개의 죽음도./조선에 있었을 때 나는 나와 개를 항상 연결 지어 생각했다. 우리 둘 모두 학대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가장 딱한 동포라는 생각까지 했다.”(조정민 옮김, 같은 책, 183)

 

가네코의 옥중수기에는, 부강 시절 할머니에게 쫓겨나서 어린 그녀가 만주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눈과 모래가 섞여 가차 없이 얼굴과 다리를 때리는춥고 추운 조선의 겨울밤을 지새우는 장면이 나온다(조정민 옮김, 같은 책, 104). 쫓겨난 그녀와 함께 밤을 지새운 따스한 개. 그 개보다 못한 차디 찬 할머니=일본인이 그녀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부강체험: ‘머슴 고씨박대에 대한 분노감

이어서 가네코는, “내 경험을 이야기 하자니 머슴 고씨가 생각난다.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쓰지 않으면 미안한 마음이 들 것 같다.”고 하여 제법 길게 부강에서 사는 동안 체험했던 조선인 머슴 고씨에 대한 박대, 그에 대한 그녀의 분노감을 솔직히 또렷이 적어두었다.(조정민 옮김, 위의 책, 106-109쪽 참조) 그 내용은 이렇다: 이와시타가에는 고씨 성을 가진 머슴이 있었다. 머리가 좋지 않았으나 정직하고 일도 잘했다. 이와시타가는 그를 다른 집보다 싼 급료를 주고 고용하고 있었다. 아내와 세 아이를 거느린 그 가족은 늘 가난을 면치 못했다. 그들은 배불리 밥 한 번 못 먹고, 한겨울에도 쌀가마니 속에 들어가 오들오들 떨며 지냈다. 어느 날 고씨는 옷을 빨아야 한다며 하루 동안만 좀 쉬게 해달라 간청했다. 가네코의 할머니와 고모도 그 뜻을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놀리듯이 계속 말을 되풀이하게 하자, 고씨는 입을 옷이 없어서, 빨래가 마르는 동안 벌거벗은 채 떨고 있을 수 없으니 이불을 두르고 있어야 합니다.”라는 비참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런데도 가네코의 할머니와 고모는 낄낄대며 웃기만 하였다. 이 광경을 보고, 가네코는 말했다: “아아. 한쪽은 악의적인 장난, 다른 한쪽은 간절함. 이 대조적인 풍경이란. 어린 나였지만, 아니 어렸기 때문에 나는 정의감에 사로잡혀 할머니와 고모에 대해 지금까지 없던 분노를 느꼈다.”

 

부강체험: 3.1운동 목격, 반역적 기운을 느끼고 감격

마지막으로, 부강의 체험 가운데 사상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지역민들의 3.1운동을 목격하고, 일본인들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역적 기운을 느끼고, 감격하는 대목이다.

야마다 쇼지는 말한다. “가네코가 가장 깊은 동정을 드러냈으며, 그녀의 인상에 가장 깊이 남은 것은 19193월의 ‘3.1운동이었던 듯하다.”(정선태 옮김, 앞의 책, 53) 이어서 야마다는 당시의 노인의 증언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 “부강 최노인의 최상에 따르면 이곳에서도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것을 제지하려는 헌병이 말을 타고 여러 마을들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조선인들은 밤이 되면 산으로 올라가 횃불에 불을 붙이고 만세를 외쳤다. 그런 일이 4, 5일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부용면에서는 41일에도 산상 봉화시위가 있었다.”(같은 책, 같은 곳)

옥중수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가네코는 3.1운동에서 참가한 경험을 재판기록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 “조선인들이 지니고 있는 사상 중에서 일본인에 대한 반역적 정서만큼 제거하기 힘든 것은 없을 것입니다. 1919년에 있었던 조선의 독립 소요 광경을 목격한 다음 나 자신에게도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으며, 조선쪽에서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습니다.”(같은 책, 같은 곳에서 재인용)

 

가난-반감-반항심-동정심에서 사회주의사상으로

조선에서 체험한 것은 위의 ①∼③ 외에도 고리대금업 등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을 목도하면서 가네코는 조선인들이 불쌍하게 억압당하고, 고통받고, 착취당하는것에 한없이 동정심을 갖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겪어오면서 느낀 감정들이 정당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줄’ ‘사회주의/사상에 접하면서 불이 붙는다’.

 

사회주의는 나에게 특별히 새로운 것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겪어오면서 느낀 감정들이 정당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줄 뿐이었다. 나는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하다. 그 때문에 나는 돈을 가진 자로부터 혹사당하고 괴롭힘을 받았으며 들볶였고 억압당했다. 또한 자유를 빼앗겼으며 착취당하고 지배당했다. 이런 나는 힘을 가진 자들에 대해 항상 마음속 깊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진심으로 동정했다. 조선의 할머니 집 하인 고씨를 동정했던 것도, 불쌍한 개마저 동지처럼 느꼈던 것도 그 외에 이 수기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할머니 주위에서 일어난 많은 일에서 억압당하고 고통받고 착취당하는 불쌍한 조선인에 대해 한없이 동정했던 것도 이러한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던 반항심과 동정심은 순식간에 사회주의 사상에 의해 불이 붙어버렸다./아아, (중략) 우리와 같은 불쌍한 계급을 위해, 나의 모든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투쟁하고 싶다.//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어떻게 이러한 정신을 살려갈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무력했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그에 대한 준비도 단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불평, 불만, 반항심만 가득한 일개 반항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조정민 옮김, 앞의 책, 300)

 

가네코는 가난반감반항심동정심사회주의사상의 경로를 밟으며 이곳까지 왔다. ‘불평, 불만, 반항심만 가득한 일개 반항아가 사회주의/사상에 이론화되어 투쟁심을 기른다. 그런데 그녀는 과연 사회주의에 대해 어떤 믿음거리를 갖고 있었을까. 일본인에 대한 반항심과 조선인에 대한 동정심이 국가권력에 대한 회의를 거쳐, ‘위안 없는 사유아나키즘으로 나아가는 길목이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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