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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 가네코 인생의 시작과 끝, 부강역은 알고 있다
[최재목의 무덤기행] 가네코 인생의 시작과 끝, 부강역은 알고 있다
  • 최재목 교수
  • 승인 2019.04.22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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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강 마을의 인적 구성 - 일본인들 내부도 '돈 있는 자'와 '돈 없는 자'의 두계급으로 나뉜다
가네코의 어린 시절 - 누구보다도 말괄량이였다. 그런데도 조선에 있던 7년 동안 전혀 반대였다
가네코의 정체성 - '일본/일본인'과 '조선/조선인'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1.부강(芙江)이라는 곳

부강이 어딘지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봤다. 우연히 1,900년대 초반쯤 찍었을 부강의 풍경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우와, 참 멋지다! 옛날에는 이런 목가적 풍경이었다니!’ 흑백의 풍광을 한참 들여다본다. 넘실대는 강물 위에 둥실 떠 있는 배 두 척. 도대체 여기가 어디일까? 아, 지금 이런 곳이 있기나 한 걸까?

부강, 금강 내륙 하항(河港)의 종점
현재 부강은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芙江面)에 소속이다. 이전에는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芙蓉面)에 속해 있었다. 부강의 강은 금강 줄기이다. 남한에서 한강과 낙동강 다음으로 큰 강인 금강(錦江). 전라북도 장수에서 발원하여 옥천 등을 지나 부강에 이른다. 강줄기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서해의 군산만이다.
금강은 예부터 서해와 내륙을 잇는 수로로서 수운(水運)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호남선이 개통하고 육로교통이 발달하기 전까지 청주?대전 인근에 위치한 부강까지 서해의 소금과 각종 해산물, 그리고 일용잡화를 실은 작은 배가 금강 물줄기를 따라 드나들었다. 부강은 금강의 내륙 하항(河港) 종점으로, 근대기까지 청주 경제의 관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곳은 농촌이면서도 시장이 발달해 있었다. 주변은 토질이 비옥하고 농산물(주로 쌀과 연초)이 풍부하였다고 한다.

2. 부강의 일본인들, 경제력과 위계


일본인들의 생활, ‘갑’으로서 고리대금업자
부강은, 가네코의 『옥중수기』에 따르면(조정민 옮김, 같은 책, 85-88 쪽), 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여 사는 곳이다. 조선인들은 꽤 많았고 일본인들은 다음의 40가구정도였다.
즉 “여관, 잡화점 문방구점, 이발소, 모종가게, 게다가게, 과자가게, 목공소 등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각각 한 가구씩, 의사, 우체국 직원, 소학교 교사와 같은 사람들이 각각 한 가구씩, 헌병 다섯 가구, 농부 세 가구, 매춘부 두 가구, 역장 및 역원 네 가구, 철도 직원 서너 가구, 그리고 조선인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는 자가 예닐곱 가구, 해산물 중개업자가 두 가구, 담배와 막과자 소매점 두세 가구”였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전혀 융화되지 않은 채 각각 지자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일본인 마을 내부의 모습과 습속을, 가네코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모두 금전적 이익 때문에 모인 자들이었기 때문에 공동체 의식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다. 마을을 지배하는 정신과 힘은 모두 경제력이었다. 돈이 있는 자는 자연히 세력을 가질 수 있었고, 마을의 행정 - 이라고 하면 조금 과장된 것일지 모르지만 - 에도 위세를 부릴 수 있었다. 즉, 돈이 있어 빈둥빈둥 놀고 지내며, 도시에서는 약간 유행이 지난 옷을 입고 있는, 그런 계급들이 으스대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힘이 있는 자는 단순히 돈만이 아니라 얼마간의 논과 받을 가지고 조선에 생활의 뿌리를 내린 자였다. -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고리대금업자가 가장 많았다 - 그 다음은 헌병, 역장, 의사, 교사 등이 힘이 있었다. 이들의 부인들은 ‘오쿠상(사모님)’이라는 경칭으로 불렸지만, 그 외의 상인들이나 농부, 인부들의 아내는 ‘오카미상(여편네)’으로 불렸다.
   마을은 그야말로 두 개의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두 계급은 물과 기름처럼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고, 여간해서는 서로 왕래하는 일이 없었다.
   (…) 부강은 작은 마을이었지만, 여하튼 본선(=경부선)의 정차장이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그곳을 통과하는 명사나 고관들의 송영을 위해 소학교 학생들과 헌병들은 물론이고 마을 유지들, 심지어는 여자들도 달려 나와 플랫폼에 정열하는 것이 거의 의무화되어 있었다. (…) 마을에서는 조금이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제등행렬이나 가장행렬 (…) 연극이나 희극(교켄)의 흉내를 내기도 했다.
   이는 실로 새로 개척한 식민지의 풍속이자 습관이었다. 남녀 모두 이러한 유희로 얼마간은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제1계급에 속하는 자들의 행사로, 제2계급자들은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은 기본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인간=‘조선인’ 위에 군림하였는데, 다시 일본인들 내부로 들어서면 ‘돈 있는 자’(=제1계급)와 ‘돈 없는 자’(=제2계급)의 두 계급으로 나뉜다고 한다. 그리고 ‘돈 있는 자’ 중에서도 ‘가장 힘이 있는 자’는 ‘고리대금업자’였다.

가네코가 살았던, ‘구릉의 가장 높은 곳’
가네코는 자신이 살았던 고모네 집(이와시타 가문)이 고리대금업자였다고 한다. 부강에서는 ‘가장 힘이 있는 자’였다는 말이다.

   우리 고모집 - 이와시타 가문 - 은 대략 이러한 분위기 속에 있었고, 그 가운데 서도 가장 유력한 편이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얼마간의 산림과 조선인들이 소작하는 논과 밭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부터 얻는 수입으로는 조선인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하였다.
   집은 선로 북측 구릉에 있었다. 남측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동네가 중심이라며 북측을 서민 동네라고 말했지만, 북측에 사는 사람들은 그 반대로 말했다. 서로 자신이 사는 동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고모 집은 구릉의 주택지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직사각형의 낮은 초가집 두 동에는 다다미 네 장 정도의 온돌방이 각각 2개씩 있었다. 집 자체는 초라했지만, 부지는 넓었다. 집 뒤에는 곳간이 두 동, 뜰 앞에 있는 밭 옆에는 쌀 창고가 한 동 있었고, 뜰에는 채소와 과실나무가 자라고 있었다.(조정민 옮김, 같은 책, 89쪽)

현재의 부강역 뒤 쪽으로 들어가면, 약간 언덕진 곳에 가네코가 기거하던 집(고모집)이 있다. 대문 안 쪽으로 들어서면 오래된 나무는 모두 잘려나가고 없지만 부지가 꽤 넓었음을 느낄 수 있다. 대문 입구 오른쪽에는 약간 높은 동산이 있고, 전체적으로 ‘구릉의 주택지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곳’임을 알 수 있다. ‘높은 곳’이란 그 마을 내의 암묵적 ‘권력’을 상징한다. 대문쯤에서 보면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부강역이 바라다 보인다. 기차를 타기에도 매우 편리한 곳이었겠다.

3. 부강역, 학대로부터의 탈출구


삶과 죽음의 통로, 부강역
가네코가 부강에 첫 발을 디딘 곳도 ‘부강역’이었고, 떠난 곳도 부강역이다. 아울러 고모집 할머니에게 학대를 받던 중 그녀가 열차에 뛰어들어 죽기로 한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말하자면 삶의 통로이자 동시에 죽음으로 떠나는 통로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조선에 온 이후로 줄곧 학대받은 것 같다. 조선에 있는 동안 나는 단 한 번이라도 할머니와 고모네로부터 애정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내가 쓴 기록을 통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불행한 역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가장 대표적 인, 가장 잔혹한 이야기를 제외한 일부분이다. 나는 일부러 그러한 것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
   어릴 때 나는 누구보다도 말괄량이였다. 남자아이들과 남자다운 놀이를 하는 걸 좋아했다. 자금도 나는 결코 어두운 여자도 아니고 우울하지도, 수줍음을 타지도 않는 여자이다. 그런데도 조선에 있던 7년 동안은 전혀 반대였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구박을 받았기 때문에 내 성격이 틀어지게 된 것이다. 일체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억눌렸기 때문에 꼬인 것이다. 학교에서는 그렇지도 않았지만, 집에 있을 때에는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조심, 또 조심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렇게 거침없이 말할 수 있지만, 당시 에는 결코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먼저 할머니와 고모의 기분을 살폈다. 그리고 그들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했다. 아니, 말뿐만이 아니라 모든 행동도 그러했다.(조정민 옮김, 같은 책, 154-5쪽)

가네코는 말괄량이였고 활달했던 것 같다. 그런 그녀가 사랑 한번 못 받고 구박만 받았으며, 일체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억눌리기만 해서, “성격이 비뚤어졌고, 꼬여버렸다”고 한다. 지배하는 자의 ‘기분을 살피고, 눈치를 보는’ 인간으로.
그러던 중, 그녀는 할머니의 학대로부터 구원의 통로는 ‘죽음’임을 직감한다. 그래서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결심한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느닷없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 차라리 죽어버리자…. 그게 훨씬 나을지 몰라.” 이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완전히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아니 완벽하게 구원받았다. 몸과 마음에 힘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시들었던 손과 발이 싱싱해 졌고, 기운도 차릴 수 있었다. 공복 따위는 영원히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2시 반 급행은 아직 지나가지 않았을 터. 그래 그렇게 하자 눈을 감고 단숨에 뛰어들면 돼. (…) 서두르지 않으면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해. 보자기를 겨드랑이에 숨기고 뒷문으로 나왔다. 그리고 단숨에 달렸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음이라는 구원의 세계로. 시원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역 근처 동쪽 건널목에 도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기차는 오지 않았다. 나는 기차가 이미 지나갔다는 걸 겨우 알아차렸다.(조정민 옮김, 같은 책, 144-5쪽)

이렇게 자살이 불발. 그녀는 방향을 바꿔, 백강(=금강)의 물에 빠져 죽기로 하고, 다시 그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강변의 맞은편에 아름다운 부용이 바라보이는, 목가적 풍경의 그곳으로…. 

기차여, “너는 몇 천 번이나 나를 지나쳐 갔다.”
드디어 가네코는 7년간의 부강생활을 마감하고, 조선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녀는 ‘눈물 한 방울’ 내보이지 않는다. “그저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소망한다. 억압과 고통, 시련을 벗어나려는 일념뿐이었다. 손에는 ‘이와시타가에서 받은 전액’ 용돈 ‘5엔’을 쥐고….

   집을 떠나던 날 고모부는 나에게 정확히 5엔을 용돈으로 주었다. 그것이 이와시타가에서 받은 전액이었다. 고모가 역까지 배웅했다. 하인 고씨도 짐을 지고 따라왔다.
   기다릴 사이도 없이 기차가 왔다. 나는 할머니랑 기차에 올라탔다. 햇수로 7년이나 살던 곳을 떠나는데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마음속으로 이렇게 빌고 있었다.
   아아, 기차여! 17년 전 너는 나를 속이고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고통과 시련 속에 나 혼자 두고 갔다. 그동안 너는 몇 백 번 몇 천 번 나를 지나쳐 갔다. 언제나 곁눈으로 흘끗 보며 말없이 지나쳤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너는 나를 데리러 왔구나! 너는 나를 잊지 않았구나. 아아, 어디든 데려가 주렴! 얼른, 얼른! 어디든, 그저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렴!(조정민 옮김, 같은 책, 168쪽)

“너는 몇백 번 몇천 번 나를 지나쳐 갔다. 언제나 곁눈으로 흘끗 보며 말없이 지나쳤다.”는 말은 문학적 표현이긴 하지만, 가네코의 삶이 안착하지 못하고 그저 무적자(無籍者)로 표류하고 있었음을 잘 말해준다.  
 
‘지배자의 사시(斜視)’와 ‘인간의 애정’ 사이의 눈치 보기
가네코는 할머니의 구박에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서, 몰래 집을 나와 굶주린 배를 안고 울며 떠돌 때였다. 조선의 한 아낙네가 “보리밥이라도 괜찮다면 먹지 않겠니?”라는 말을 듣고 감정이 북받쳐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가네코는 말했다. “조선에 살던 길고 긴 7년 동안 나는 이때만큼 인간의 애정에 감동한 일이 없었다.”고. “나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할머니와 다른 식구들 눈이 무서웠다. 조선인의 집에서 밥을 빌어먹는 거지를 우리 집에 들여놓을 수 없어, 하며 호통을 칠 게 분명했다. 나는 사양했다. 그리고 주린 배를 쥐고 조선인의 집에서 나왔다. 하지만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조정민 옮김, 같은 책, 140-1쪽) 
‘조선인’이라는 ‘인간의 애정…감동’이 있으면서, 상층의 일본인이 조선인에 접촉하면 ‘더러운 거지’로 비쳐지던 그런 ‘지배자의 사시(斜視. 사팔뜨기)’가 엄정하게 살아 있었던 부강. 어렸던 가네코는, 이렇게 교차하는 ‘판단과 시선의 층위’=‘심급(審級)’을 눈치 보고 헤아리며, ‘일본/일본인’과 ‘조선/조선인’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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