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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말의 씁쓸함
학기말의 씁쓸함
  • 김미희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3.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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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이른 아침 조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모교수의 서신을 내게 급히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신이라니, 그것도 모교수가 내게?

기말이면 연구실을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다. 대체로 출석률이 저조하거나 시험 성적이 좋지 않을 것을 예상해서 오는 학생들이다. 가정 형편, 개인적인 문제, 장학금 수혜, 학사경고 등 다양한 이유를 들어 선처를 호소한다. 학생들의 방문은 대개 소득 없이 끝나지만 더러는 재시험이나 리포트 등을 통해 보완의 기회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다른 학생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서 신중히 판단해야 하고 필요한 경우 다른 수강 학생들의 동의를 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경험으로 볼 때 이러한 ‘인간적인 배려’는 학생에게나 필자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이런 배려는 학생을 게으르게 만들고 수업의 참여도를 더욱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예외의 경우는 한이 없고 성실하게 수강한 학생들과의 형평성이 늘 문제가 된다. 때문에 나는 학생들의 찬바람을 몸으로 느끼면서도, 학점에 관한한 원칙주의를 고수해온 편이다.

평소 생각과 사는 방식이 많이 달라 나와는 공적인 자리에서 의견 충돌도 더러 있었던 모교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내게 사적인 편지를 전하는 이유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존경하는 교수님”으로 시작되는 그의 편지는 퇴학의 위기에 처한 지도 학생의 학점 구제에 관한 내용이었다. 최근에야 알게 된 학생의 정서적, 심리적 문제를 먼저 헤아리지 못한 자신의 불민함을 탓하며 '껄끄러운  동료 교수’에게 무려 세 장이나 되는 긴 글로 선처를 부탁하고 있었다.

불쾌하고 찜찜해졌다. 그 학생은 며칠 전 내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도 교수의 정성과 관심에 성의는 보이자 싶어 학생을 다시 만나 보기로 했다. 오랜 동안 가정 폭력을 겪고 그 후유증으로 학생은 도저히 학업에 몰두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당장 정신과 상담이 필요해 보였다. 나는 차마 남자 지도 교수께는 하지 못한 이야기를 눈물로 쏟아내는 그에게 과제를 내주며 같이 극복 방법을 모색해 보자고 손을 꼭 잡았다. 

며칠 후 우연히 그 학생이 지난 1년 동안 지도 교수의 프로젝트에 참여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다. 알 수 없는 배신감과 씁쓸함이 밀려왔다. 설마, 그 눈물, 그 편지가 거짓은 아니겠지. 보이는 대로 들은 대로 믿자고 거듭 다짐해본다. 하지만 찜찜함과 혼란스러움을 지울 수가 없다. 학기 초에 제시한 기준과 원칙대로 성적을 산출해 기계적으로 등급을 부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원칙과 소신을 지켜나가는 일이란 얼마나 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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