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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은 잘 하냐?
한국말은 잘 하냐?
  • 김주성 한국교원대 명예교수·전 총장
  • 승인 2019.01.28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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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김주성 한국교원대 명예교수·전 총장

유학시절이었다. 대학원과 군 복무를 마치고 떠났으니 꽤 늦은 유학생활이었다. 아이 둘까지 딸려 있었으니 생활전선도 빠듯했다. 조교를 하면서 새벽에 신문을 돌렸다. 힘들기도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세미나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좌담 삼아 토론 삼아 진행되는데, 종잡을 수 없으니 여간 막막한 게 아니었다. 가끔 짧은 영어로 돌발질문을 해서 대화 방향을 내 관심사로 돌려보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대화가 조금만 진행되어도, 금방 실마리를 잃고 먼 하늘을 바라보는 격이었다. 

첫 학기는 그러려니 했지만, 몇 학기가 지나도 생각만큼 만만치가 않았다. 오가면서 지나치던 교수님이 어느 날 “유학생활이 어떠냐”고 물었다. ‘다 좋은데 영어 때문에 고생한다’고 했더니, “How about your Korean?”하면서 살짝 웃는다.

당시에는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 한국말이야 모국어인데 무슨 문제란 말인가? 문제는 영어지. 스스로 탓도 많이 했다. 중학교 때부터 익혔던 영어인데 제대로 안 되었으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시험 잘 보려고 배웠던 영어지, 영어 잘하려고 배웠던 영어가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시험 잘 보라고 가르쳤던 영어지, 영어 잘하라고 가르쳤던 영어 같지도 않았다. 학교 탓도 많이 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교수님의 한 마디는 심오한 뜻을 드러냈다. 첫 발표논문을 준비할 때였다. 글줄이 영 나가질 않았다. 써 놓고 보면 조사가 어색해 보이고, 고쳐놓고 보면 시제가 엉망인 것 같았다. 주어를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은데, 콕콕 집어넣자니 숨이 콱콱 막혔다. 주어가 겹칠 때는 대명사를 써야 할지 그냥 반복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글줄이 길어지면 쉼표를 찍어야 할 것 같은데, 어디에 찍어야 할지 자신 없었다. 

‘영어가 어려운 줄 알았더니, 우리말이 더 어렵구나!’ 답답한 심정은 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였다. ‘그래, 영어가 힘들었던 까닭은 내가 우리말에 서툰 탓이었던 게야!’ 이중언어의 환경이 아니면, 언어능력은 모국어에서 길러진다는 언어학의 평범한 지혜를 뒤늦게 깨달았다.

귀국 한지 몇 해 되지 않은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한국을 방문하셨던 지도교수님을 김포공항에서 배웅한 뒤 주차장에 돌아와 차 문을 열 때였다. ‘왜 이렇게 무덥지?’ 줄줄 흐르던 땀을 훔치는데 문득 스치는 생각이, ‘아! 무더위는 물+더위였구나.’ 여태껏 ‘무지무지하게 더운 더위’로만 여겼었는데, 처음으로 ‘물기 많은 더위’라고 선명하게 깨우치게 됐다.    

이에 용기를 얻고 새삼 우리말을 파고들었다. 어원을 탐색하면서도 세련된 글 감각을 얻고 싶었다. 글을 쓸 때는 써놓은 글줄을 수없이 속으로 되뇌었다. 어색하게 느껴지면 고치고 또 고쳤다. 그러면서 다음 말을 찾고 다음 글줄을 찾았다. 글을 끝내고도 읽어보고 고치고 읽어보고 고치고 그랬다. 어쩌면 ‘서러움에 겹도록 부르는’ 초혼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글줄이 살갑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50줄이 한참 넘어서였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히딩크의 말로는, “I’m still hungry.”

우리말의 어원을 찾다 보니, 분석적인 학문방법도 깨닫게 되었다. 우선 개념어부터 분석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궁금하면 각종 어원사전과 용례사전, 갑골문 주해서까지 들췄다. 물론 충분할 수는 없다. 개념어를 제대로 다루려면 텍스트와 콘텍스트, 시대상황과 역사변천까지 꿰뚫어야 한다. 그래도 역시 첫걸음은 어원분석이었다.

김주성 한국교원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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