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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주의가 잉태한 근대의 '출구'
계산주의가 잉태한 근대의 '출구'
  • 양도웅
  • 승인 2018.10.29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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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강연 시리즈_이진경 서울과기대 교수의 「근대성과 그 외부」

근대를 넘어서기 위해 근대의 기원을 꼭 밝혀야만 할까? 근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알면 우리는 근대 이후의 세계를 만들 수(상상할 수) 있을까? 하지만 기원을 찾는 대부분의 시도는 낭만주의(반이성, 반합리주의 등)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 시도들은 근대를 이성과 합리주의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또한, 평등과 자유를 비판의 근거로 삼았지만, 그 시도들은 대개 체제(공동체) 비판이나 체제 해체가 목적이었지, 체제 구축이 목적은 아니었다(설령 체제 구축을 위한 시도들도 지나치게 추상적이었다). 인류가 체제 없이 산 적이 인류사에 있었던가? 이런 의문들을 품고 지난달 29일 네이버 문화재단 주최 ‘문화의 안과 밖’ 강연 시리즈 35번째 강연자로 나선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기초교육학부)의 강연을 들으면 흥미롭다. 강연 제목은 「근대성과 그 외부」였다. 강연문의 결론 부분을 발췌 소개한다. 

양도웅 기자 doh0328@kyosu.net

지난달 4일, 이진경 교수가 네이버 문화재단 ‘문화의 안과 밖’ 강연 시리즈의 35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이 강연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열린다. 사진 제공=네이버 문화재단
지난달 29일, 이진경 교수가 네이버 문화재단 ‘문화의 안과 밖’ 강연 시리즈의 35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이 강연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열린다. 사진 제공=네이버 문화재단

근대성의 본질은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한 것으로 변화시키려는 계산주의적 태도이다. 이는 과학사에서 하나의 불연속을 만들며 탄생한 갈릴레이의 기획에 의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모든 것을 계산하려는, 어찌 보면 광적이라 할 이 의지는 동방과의 교역에 의해 부를 축적한 중세도시의 시장을 모태로 하는 것이었다. 도시 외부로 시장이 확산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중세도시의 배타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화폐와의 교환 가능성을 통해 가치의 존재와 크기를 증명해야 하는 계산 공간을 탄생시켰다. 이후 시장의 확대는 인간의 삶 전반을, 사물은 물론 인간 자신조차 계산주의적 태도 속에 포섭시켰다. 동시에 시장에서의 인간관계, 즉 화폐 말고는 어떤 특권도 인정하지 않는 관계를 통해 다른 신분의 사람들을 등가화하는 태도를 발동시켰다. 이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보편적’ 범주로 모든 사람을 동질화하는 단서를 제공했다. 홉스를 거치며 탄생한 계약론이 인간의 평등성이란 관념에, 동등한 자연권이란 개념에 도달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도시에 국한된 이러한 관계를 도시 밖으로 全國化한 건 절대왕정의 중상주의 정책이었다. 이제 인간은 ‘인구/주민’을 형성하는 개개의 ‘원자’가 돼 주권의 소유자이자 그것의 대상이 됐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근대성의 기원이란 사실 시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 두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서구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것을 보면,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공동체 외부에서 발생한 화폐, 해방된 노예들의 ‘천한 직업’에서 시작된 상업을 기원으로 갖는 시장에 새로운 형상을 부여한 것은 역으로 근대과학이었다. 또한, 그리스를 기원으로 갖는 미학적 본질주의는 어쩌면 중성적일 수 있는 이 계산주의적 태도에 미적 가치를 부여했다. 이로써 화폐와 시장을 모태로 탄생한 근대적 계산 의지는 근대과학과 그리스적 기원을 통해 그 천한 얼굴을 고귀하고 탁월한 얼굴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화폐, 계산, 인간, 기원이라는 항들이 근대성의 배치를 형성하는 기본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요소들 가운데 가장 표면에 있는 것이 화폐이고 그 반대의 심층에 있는 것이 기원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가장 표면에 드러내놓은 것이 기원이고 가장 심층에 숨어 있는 것은 화폐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네 가지 요소들을 잇는 윤곽선 인근에서 우리는 근대성의 경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각각의 요소들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지만, 그것이 자리 잡게 되면서 추방하고 매장해 버렸던 외부를 갖는다. 근대과학은 중력과 실험이라는 마술적 과학의 요소를 그 중심에 끌어들였지만, 자리를 잡게 되자 마술적 과학을 ‘재판’하고 추방해 버렸다. 시장과 화폐는 공동체 사이에서 발생한 것이고, 공동체가 생산한 ‘가치’로부터 이득을 얻은 것이었지만, 그것이 공동체에 행한 가장 중요한 반대급부는 공동체 자체의 파괴였다. 

화폐가 자동으로 발동시키는 교환 관계가 공동체의 증여 관계를 파괴한다는 것은 쿨하게 서술할 수 있다. 크로폿킨(P. A. Kropotkin)은 코뮌이었던 중세도시가 성벽을 높이 쌓아야 했던 건 교환 관계라는 형식으로 인근의 농촌을 초과 착취했던 자신의 업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토머스 모어로 하여금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라고 말하게 했고, 오지에(Emile Augier)나 마르크스로 하여금 “모든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며 태어났다”라고 말하게 했던 ‘인클로저(enclosure)’,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파괴해 사적 소유물로 바꿔버린 대대적 탈취의 과정이 암스테르담 시장의 양모 가격 때문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홉스가 정치의 밑바탕에 끌어들였던 ‘인간’이란 개념은 한 사람의 통치자에게 자신의 모든 권리를 양도하고 국가라는 괴물의 지배를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어리석은 숙명의 주인공이 됐다. 혁명이라는 사건을 통해 ‘인간’의 타고난 권리를 선언하며 탄생한 근대국가는 ‘여전히 인간이 아닌 자’들, 혹은 ‘아직도 인간이 아닌 자’들에 대해선 최소한의 정치적 권리를 주지 않음으로써 ‘비인간화’하는 아이러니를 뒤에 감추고 있었다. 문명 자체와 동의어가 된 서구의 고귀하고 탁월한 기원, 그리스는 자신의 ‘검은 기원’을 지워버리기 위해 자신의 모태가 돼준 것을 어둠 속에 매장하는 야만적 배덕을 통해 탄생한 것이었으며, 그럼으로써 비서구 전체를 미개와 야만으로 타자화하고 ‘문명화’란 이름으로 식민화하게 해준 ‘원리’가 됐다. 

종종 ‘탈근대’라고 묘사되는 근대성 자체에 대한 반문이 겨냥하는 것은 이러한 경계 속의 근대성과는 거리가 먼 듯하다. 거대담론의 종말이나 원본을 초과한 허상들의 시대. 그것은 지금 우리가 목도한 현실의 중요한 단면이지만, 거대담론이 지배한 시대가 어디 근대뿐인가. 거대담론의 종말이라는 명제 자체가 또 하나의 거대담론이란 점은 그만두고라도, 근대 이후에 정말 거대담론이 사라질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마찬가지로 원본에 대한 충실성이 강요되던 것이 어디 근대뿐인가. 허상들이 범람하고 허상들이 원본을 초과하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음은 분명하지만, 허상들이 정말 원본을 초과하는 것이 단지 그 양적인 증식에 따른 영향력의 초과를 뜻하는 것일까? 정작 중요한 건, 허상이 원본으로부터 제대로 독립하려면 원본으로 환원 불가능한 어떤 것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아닐까?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근대성이라는 지반 자체를 전복하는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저 근대성의 지반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로부터 이탈하는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는 것이 아닐까? 사실 근대가 이미 와해되기 시작했다면, 그런 점에서 이미 탈근대라고 부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면, 그것은 그런 균열과 해체, 탈영토화의 선들이 여기저기서 광범위하게 출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나는 근대성의 경계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現行化하려는 시도들을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실행해야 한다는 촉발의 선언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다. 화폐와 시장에서 벗어난 다른 관계를 구성하려는 실험, 계산주의적 지식을 넘어선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인간 아닌 것들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들과 다른 관계를 형성하려는 시도, 그리고 그리스를 앞세운 서구적 사고를 벗어나서 사고하고 서구적 감각에서 벗어난 감각을 통해 다른 삶의 출구를 찾는 것 말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기초교육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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