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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의 비루한 풍경들
학회의 비루한 풍경들
  • 이경선 서강대 겸임교수·법학
  • 승인 2018.10.15 1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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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란 무엇인가? 학회 활동의 이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여러 학회를 접하면서 ‘불경한’ 질문을 한 자락 던져본다. 소박한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해하고 있기로는, 하나의 큰 연구 테마와 범주를 설정하고, 그 주제에 관심을 두는 연구자들이 모여서 새로운 정보와 생각을 교환하고, 각자가 생산해 낸 지식을 비평하고 점검하는 모임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한국연구재단은 가짜 학회, 가짜 학술지, 가짜 학술대회에 대한 판단을 돕기 위해서 판별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국내 연구자들에게 배포하고 경각심을 갖도록 한 바 있다. 돈만 내면 엉터리 논문도 실어주고, 엉터리 학술행사 발제 실적도 만들어주는 상술을 규제하고, 그 진위를 알면서도 이를 이용하여 학자적 위신을 지탱하려는 의도에 대해 단호하게 처벌하는 것은  마땅히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학회 생태계에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이와 같은 범죄에 가까운 상술과 의도적 활용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본다. 딱히 꼬집어서 지적하기 어려운 경계 지점에 있는 더 고질적이고 의도적이며 지속적인 양상들이 있지 않은가 싶다. 

살펴보면, 기존의 학회로부터 분화돼 나와 새로운 학회를 조각하려는 분들을 적지 않게 보게 된다. 물론 사회적 의제 변화와 흐름에 맞추어 새로운 학술적 결합을 시도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고 긍정적인 일이라고 본다. 오히려 연혁적 권위에 젖은 학회가 속으로는 곪아 있거나 진부한 리더십으로 운영되는 경우도 많다. 학회가 너무 많다는 우려도 있지만, 학회는 더더욱 많아지고 심지어 연구자의 범위를 넘어 일반인들 중심의 학회 활동의 대중화로 이어져야 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나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연구용역 과제를 수주하기 위해 학회를 급조하는 모습들이다. 학술지를 만들거나 별다른 학회 활동 이력도 없이,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생학회가 정부연구과제를 수주했다면, 구성원의 ‘맨 파워’와는 별개로, 그 학회는 돈을 벌기 위해 관료와 통정하여 설립한 것으로 의심해볼 만하다. 일종의 학회형 페이퍼 컴퍼니(서류상 회사)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새로운 학회를 만들어 ‘학회장’이라는 감투를 설정하고 이를 공적 영역에서 유무형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인 경우도 적지 않다. 

두 번째로 지적해 볼 것은, 학회 활동을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도 이곳저곳에 자신의 이름을 방대하게, 문어발식으로 걸어두는 경우이다. 교수 즉 연구자라는 직업적 특성상 강의하고 연구하고 사회활동을 하다 보면 분주하고 바쁠 수 있다. 학회의 활동이란 것도 열심히 참여하고 주도했다가도 어느 시기에는 느슨해질 수 있고, 불러주면 또한 언제든지 학술 무대에 오른다는 자세로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회원들에게 적용돼야 할 이해 기준이 아닌가 싶다. 학회 명의의 학술행사 등판이나 기고 등 별다른 활동을 하지도 않으면서 너무 과도하게 부회장, 이사 등의 직함을 나누고 암묵적으로 이를 이력으로 삼는 것이 과연 적합한지 의문이다. 개인의 열정 차이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여러 학회에 걸쳐 임원을 열 곳 스무 곳 이상을 동시기에 맡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학회가 많아지는 요인은 아닐까도 싶다. 이것은 마치 강의도 한 적도 없으면서 객원교수, 초빙교수, 외래교수 직함을 사용하는 일부 의원이나 고위공직자들의 위선과 허세와 다르지 않다. 건전한 의식을 가진 연구자라면, 한해에 적어도 3곳을 초과해서 학회 임원을 맡는 것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학술지 발간에서도 서로 원고 경쟁하는 모습을 빈번하게 본다. 한정된 연구자 풀 속에서 원고 경쟁, 원고 구걸, 원고 쪼개기가 계속해서 발생한다. 꾸역꾸역 원고를 모아 근근이 학술지를 이어 간다. 학회니까 학술지를 내는 것은 신성하고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좀 더 확장된 시각에서, 학회니까 학술지를 발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넘어설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쩌면 학회가 많아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학회를 만들고 나서 천편일률적으로 학술지를 출간하겠다는 고착된 생각에 매몰돼 있다 보니 문제가 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연구재단의 등급매기기식, 규제주의식 학술지 평가가 학술생태계를 좌지우지하게 만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학술지 형태도 좀 더 다양하게 권장되고 변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학술지가 아니라 활용도가 높은 이론서나 실무서 등 새로운 교재를 개발하고, 학술 잡지를 발간하고, 학술활동에 연계되는 범위 내에서 학회 회원이 조합원이 되는 창업과 수익사업도 권장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학회가 왜 돈벌이에 나서느냐는 견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 걷히지도 않는 회원 회비로 연명하고, 관가의 학술지원 사업에 의존하는 상황보다는, 시장성이랄까 대중성을 가진 지식 콘텐츠를 중심으로 학회의 활동을 다변화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학회 행사 때마다 발제자나 토론자의 중복 과다 출연 문제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이쪽저쪽에서 ‘간곡한’ 섭외를 받다 보니 우연히 정이 많아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일부 연구자들의 욕심이 깃든 경우도 드물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국회에서 매일 매일 스무 건 가까이 개최되는 정책토론회, 입법공청회, 세미나, 간담회 등의 경우를 들어볼 수 있다. 국회 행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널리 알려진 교수들이 반복적으로 과다하게 출연한다. 동일한 의제에 대해서 일관성 있게 패널이 섭외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섭외하는 측에서 쉽게쉽게 패널을 찾다보니 발생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한 연구자가 여러 학술 무대에 과도하게 출연하고 관성적으로 섭외에 응하는 것도 스스로 일정 횟수 이상은 자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본다. 

자리 잘 잡고 사는 연구자들이 뭐가 아쉬워서 발제 기회를 독과점하며 자잘한 거마비까지 욕심을 내겠는가 하고 이해해 드리고 싶다. 잘 알려지지는 않지만, 더욱 충실한 연구 자세로 발제에 임하고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를 불어넣어 줄 연구자들이 적지 않다. 이런 연구자들이 좀 더 다양한 무대에서 소신을 밝힐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극단적으로는 동일 연구자가 일정 기간에 연구 과제를 100% 이상으로 수행할 수 없듯이, 국회나 정부 등 공적 예산이 투입되는 행사에서는 동일한 패널이 연간 최소 12회 이상 출연할 수 없도록 하는 등의 가이드까지도 생각해 봐야할지 모르겠다.   

학회라는 이름의 결집체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참신한 지식을 왕성하게 생산해내는 혁신적 거점이 됐으면 한다. 우리가 구축한 기존의 학술생태계가 새로운 응집력, 새로운 대중과의 소통 방식을 지향해 가는 논의가 시작됐으면 좋겠다.

이경선 서강대 겸임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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