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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갓집 개 신세, 飜譯
상갓집 개 신세, 飜譯
  • 박명진 중앙대
  • 승인 2003.05.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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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한문학과 외국문학을 전공하는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질문하는 게 하나 있다. 박지원을 읽고 싶고 브레히트나 벤야민의 全作을 읽고 싶고 라캉과 프레드릭 제임슨의 저서들을 읽고 싶은데 왜 아직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다. 그들은 각기 자신의 전공 세계에서 나름대로 인정받고 성실하게 학문에 정진하는 세대이면서도 딱히 명쾌한 답변을 주지 못한다. 한 젊은 학자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우리 나라의 학문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추체험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할 때면, 한국 학문의 부박한 근대성에 대한 자아비판으로 들린다.

우리 고전과 외국 문헌을 우리말로 번역해야 하는 전문가들이 작업에 몰두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현실적인 제약에 있을 것이다. ‘매천야록’ 하나를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 7년이라는 세월을 몽땅 투자해야 했던 한 젊은 국문학자에게 한국의 학문 제도는 가혹하리만큼 무정하게 대접한다. 7년이라면 1년에 논문 한 편씩을 저명 학술지에 게재한다고 했을 때 7편의 실적을 남길 수 있는 시간이다.

현재 거의 모든 대학이 번역 작업을 연구 업적으로 온당하게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논문 작성보다 몇 배나 힘든 이 작업에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은 실로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번역된 외국문학이나 이론서를 통해 지식을 축적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몇몇 번역서를 통해 중요한 작가들의 이름이나 작품명을 접하고, 이론서 본문 중에 잠깐 인용된 외국 학자들의 글을 통해 그들의 사상을 유추한다. 그러나 유령처럼 우리 학자들의 담론 속을 배회하는 수많은 외국 이론들의 출처는 거의 오리무중이기 십상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번역의 왕국’ 일본은, 과장 섞어 말하자면, 지구상의 모든 저서들을 자국어로 옮겨놓는 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라는 책에서 볼 수 있듯,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는 번역과 함께 진행돼 온 것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우리말로 重譯해서 읽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우리 현실이었다면, 우리의 근대는 번역의 대상이 되는 서구나 이 서구를 앞장서서 이해하려 했던 일본의 근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그려낼 수밖에 없다.

비체계적으로, 그것도 간헐적으로 소개되는 重譯 서적을 통해 외국을 접해왔던 모습은 사실 무척 우울한 자화상이다. 물론 더글라스 로빈슨의 ‘번역과 제국’에서처럼 번역 과정에 숨어있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심각하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 양키 시장에 널려 있는 미제 상품처럼 두서없이 소개돼 온 번역물들은 그 자체로 제국에 대한 또 하나의 종속성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로빈슨이 지적했듯, 번역은 오리엔탈리즘의 전초병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탈식민화를 촉진시키는 채널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분명하고 부정확한 대상과 싸우는 것은 유령 앞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19세기 중후반 한양에 거주하고 있던 선비 혜강 최한기는 당시 조선에서 책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수입서점상을 들러 새로 들어온 서양의 과학기술서적을 누구보다 먼저 구입해 읽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그에게 한 지인이 당시 책값이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가령 이 책을 지은 저자나 책 속의 인물이 나와 동시대의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가 현재 나와 같이 살아 있다면 그를 만나기 위해 천리를 멀다않고 찾아가야 하지만 지금 이 책으로 말미암아 나는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그를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책을 구입하는 것이 돈이 많이 든다고 하지만 식량을 싸 가지고 먼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는가.” 중국의 새로운 서적과 서양 관계 번역서들을 조선에서 가장 먼저 사 볼 수 있는 사람이었던 최한기는 평생 동안 ‘推測錄’, ‘神氣通’, ‘氣測體義’, ‘人政’ 등 1천 여권의 저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시대의 변화를 읽고 있었고, 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외국의 새로운 이론들을 섭렵했다.

출판사는 경제적 이윤이 없다는 이유로, 대학은 교수 업적 평가 기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구자들은 힘도 들고 연구 업적 점수도 얻지 못한다는 이유로 번역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학자들이 자리를 얻기 위해, 그리고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등재학술지나 SCI급 국제학술지에 논문 한편을 게재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학진이나 문광부 등의 학술진흥 프로젝트를 따냄으로써 평가 점수를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사이, 번역돼야 할 우리의 고전과 외국 문헌들은 갈 곳 없이 헤매는 상갓집 개 신세가 된다. 이제 우리가 생산할 수 있는 학문 작업의 목록들이, 수익성을 목적으로 하는 각종 프로젝트의 무미건조한 ‘결과 보고서’와 각종 증빙 서류들로만 채워지는 것은 아닐까. 새삼 섬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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