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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후진성
폭력의 후진성
  • 문용린 논설위원
  • 승인 2003.05.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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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언제까지 이런 후진성을 끌고 갈 것인가. 순치되지 않은 원색적인 감정이 곳곳에서 폭발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의견과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 만의 것이 옳고 바르다는 유아독존적인 사고가 사회 곳곳에 흘러넘치고 있다. 이러고도 법치 국가인가 싶은 일들이 요즘 들어 부쩍 더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서, 그리고 무소불위의 不正義한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폭력만이 불가피한 유일한 수단이었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 시절을 우리는 후진시대로 기억한다. 그 시절에 우리는 암울했고 불행했다. 폭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후진국 지식인들의 어쩔 수 없는 논리를 펼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사회 곳곳에서 불기 시작한 민주화의 급물살에 힘입어, 더 이상 폭력이 불가피한 사회변혁의 수단이 되지 않아도 되는 민주화 시대를 맞게 됐다.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 모두 폭력에 맞서 싸우던 민주화의 투사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올해 초 화려하게 등장한 노무현 대통령과 더불어 젊은 개혁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기에 조차 이르렀다.

이제 왜 더 이상 폭력이 필요한가. 폭력이 아니면 해결하기 어려운 거대한 부정의한 힘이 아직도 남아 있는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폭력이 아니면 해결키 어려운 부정의한 정책을 과거의 독재정권들처럼 감행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제 폭력을 그만두자.

그래도 여전히 폭력을 쓴다고 하면 그것은 감정통제 불능증 환자이거나, 아니면 새로운 젊은 정부를 과거 독재정권과 동일시하는 시대착오자로밖에 볼 수 없다.

폭력은 아무 때나 쓰는 것이 아니다. 독재정권의 타도에나 소용이 닿는 것인데, 이를 남용하는 것은 애국은 커녕 국가에 대한 해악 행위이다.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버스 운전사를 마구 구타하는 폭력이나, 대통령의 앞길을 우격다짐으로 가로막는 폭력이나 같은 수준의 후진적 폭력이다. 단지 전자는 충동성 폭력이고 후자는 학습된 폭력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무소불위의 독재 권력의 횡포에 맞서 싸우면서 우리 자신이 또 다른 폭력의 얼굴을 그대로 닮아갔다는 사실은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생채기다. 그 아픔은 합리적 이성이라는 이름의 더 많은 대화와 타협을 환기해준다. 힘에 의존하지 않는 대화, 물리력 행사로 나아가지 않는 더 많은 대화는 우리 사회의 성숙을 의미한다. 감정통제 불능증 환자나 시대착오자의 사회가 아니라, 함께 성숙해가는 사회, 바로 그 문턱에 우리가 서 있다.
“저 후진성, 도대체 언제까지 갈 건가.”

문용린 / 논설위원·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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