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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교수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을 분석한다
이한구 교수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을 분석한다
  •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언어철학
  • 승인 2018.01.2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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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일상언어

<교수신문> 905호 원로칼럼에 실린 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의 「인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읽고,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반론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정 명예교수는 “이 교수의 칼럼은 그의 관점에서 잘 쓰인 글인 동시에 그간 필자가 옹호해온 포스트모더니즘, 상대주의, 다원주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으로 읽힌다”고 말하며 필자의 관점을 변호하는 반론을 보낸 것입니다. <교수신문>은 학계 원로들의 성숙한 토론을 1면에 공개함으로써, 이를 통해 교수사회의 건전한 학술토론 문화가 활발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래에 정 교수의 반론 전문을 싣습니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I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주제

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의 「인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칼럼은(<교수신문>905호, 2018년 1월 1일)은 신선하다.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관심, 애정, 주장, 선언들이 많이 문자화돼 있었지만 이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의 글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성인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필자는 학회의 휴식시간이나 식사자리 같은 사석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부정하는 이야기들을 들어 왔다. 말도 안 된다느니, 무의미하다느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부정적 기류가 강한 만큼 본격적인 비판문이 나올 만 한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외국도 형편은 비슷한 것 같다. 하버마스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했을 때 참신했던 것은 바로 지성인 사회에 내재된 그 괴리 때문이다. 이 교수의 글은 산뜻할 뿐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해 온 필자에게는 진지한 지성과의 한 만남을 더 제공해 주는 계기다.
이 교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선명하게 다음의 세 논제로 규정 한다. (1)현실은 언어에 의해 창조되며, 언어를 떠난 객관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2)텍스트에 대한 모든 해석은 주관적이며 가치에 관한 보편적 기준은 없다. (3)지식은 정치적 성격을 갖는다. 필자를 포함해서 많은 독자들은 세 논제를 일상적으로 해석하는데 부담감을 갖지 않을 것이다. 칸트 이후 현상은 개념에 의해 창조되지는 않지만 구성된다는 것이 일반화된 믿음이다. 해석이란 그 행위의 문법적 구조에 의해 주관이 개입할 수밖에 없고 해석의 기준이 다양한 만큼 일의적으로 보편적이라 할 후보 기준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은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힘의 논리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세 논제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정의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개연적인 규정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특이하게도 세 논제 각각에 대해 구체적 논의나 반박을 하지 않는다. 저자는 세 논제가 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 무용명제 또는 유해명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자가 포스트모더니즘 세 논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자리를 부여하는가는 이를 제기하는 문맥에 주목함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문학의 역할의 문맥이다. 저자는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세계화 등 급변하는 미래사회에 선제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인문학은 현실적으로 환경, 민족 중심주의, 국경 이주, 핵전쟁, 양극화, 성차별, 패권주의 등의 주제를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지면의 한계로 상론하지 않았겠지만 필자는 행간에서 인문학 실재론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의 오랜 연구의 결과인 역사 실재론을 인문학 논의의 배경으로 세울 수 있으면 그러하다. 역사의 해석에서 그는 합의가능성의 간주관성보다는 해석에 대해서도 반증가능성을 적용하는 존재론적 객관성을 요구하는 역사 실재론을 펴왔다. 이렇게 강한 역사 실재론은 ‘유토피아적 사회공학도 허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축하게 된다. 그의 인문학 실재론을 이러한 문맥에서 파악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을 규정하는 세 논제는 모두 의문스럽거나 유해명제가 되는 것이다.
저자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의 비실재론은 이렇게 읽어 낸 인문학 실재론이나 역사 실재론에 맞서는 지상적 과제가 된다. 역사 실재론을 내면적으로 일반화해 인문학 실재론을 표면적으로 내세우고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배적인 대항적 선택지로 맞세워 이를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학문적 진정성과 투명성이 당당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그의 비판의 논리는 무엇인가? 하버마스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러한 비판들을 분석할 수 있는 프레임은 무엇인가? 필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언어론은 일상언어론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그 프레임을 찾고자 한다. 그 비판들을 분석할 수 있는 구조를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저자는 역사 실재론이나 인문학 실재론을 변호하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의 비실재론을 비판하지만, 과연 이러한 비판으로 그 실재론이 확보되는가를 묻게 된다. 필자는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이 기반으로 하는 일상언어의 실재론으로 인문학의 실재론이 유지될 수 있다고 논의하고자 한다.

II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칼럼 저자 이 교수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뤄진다. 자의적 정책, 정치적 포퓰리즘,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구분 해소 등 포스트모더니즘이 잘못 운용되는 경우들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의 본격적인 비판은 이론적인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에 대해 두 가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첫째는 객관적 진리 논변이다. 저자는 자신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세 논제로부터 ‘현실은 가공된 것이다’를 끌어낸 다음 더 큰 문제는 ‘현실을 가공하는 언어체계가 다수이다’가 추리되는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이러한 추리로부터 상대주의나 회의주의의 결론이 ‘불가피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지성논리에 따르면 푸코에서와 같이 문명과 야만, 정상과 광기 간의 이분법적 구분이 해체되고 간수와 죄수, 의사와 환자 사이는 지식과 권력의 계기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객관적 언어는 힘을 잃게 되고 그에 따라 객관적 진리까지 증발한다고 우려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저자의 둘째 비판은 언어결정론 논변이다. 저자는 언어결정론을 어떻게 포스트모더니즘에 귀속할 수 있는지의 논의는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논제 (1)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을 언어의 감옥에 갇힌 죄수와 같은 존재로 본다’는 그의 믿음을 첨가하면 그러한 귀속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가 말하는 언어결정론은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결정짓고 현실을 규정’ 짓는다는 관점이다.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이나 프로이트의 무의식 결정론이 인간의 행위는 경제하부구조의 특정 사건 또는 무의식의 특정 상태에까지 인과연쇄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고 하는 것처럼, 언어결정론도 인간의 행위를 특정 언어 지향적 사건에 인과연쇄적으로 추적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앞의 두 결정론의 인과연쇄가 법칙 포섭적이기 때문에 언어결정론의 인과연쇄도 우연적이 아니라 법칙 포섭적이라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언어결정론이 제시된다면 이것은 매우 반직관적이다. 달리 말해, 언어결정론을 포스트모더니즘에 귀속할 수 있다면 저자의 언어결정론에 근거한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강력한 비판이 될 것이다.
저자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의 의의를 보기 위해 하버마스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을 언급해 볼 수 있다. 하버마스는 자신의 소통행위철학에서 중요한 공적 이성, 주체성, 자율성 같은 개념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명료하지 않거나 해체되고 있다고 비판하기 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방법론에 천착해 이를 비판한다. 달리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은 ‘보편적 타당성에 대한 자기 지칭적 부정’, ‘비판에 대한 규범적 정당화’와 같이 순환적이며 자기모순 같은  ‘수행적 모순’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근대성 이성만이 제시할 수 있는 개념과 방법을 사용하여 근대성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내가 내 존재를 의심하는 사유’가 수행적 모순을 범하는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더니즘 비판은 ‘나는 거짓말쟁이이다’, ‘나는 역사를 연구한다’, ‘나는 여기 없어요!’ 와 같은 자기 모순적 발설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III 포스트모더니즘 언어: 일상언어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탈계몽에 대한 정의적 규정은 회피돼 왔다. 정의적 규정을 시도하는 자체가 모더니즘적 또는 계몽적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탈계몽론이 세계나 문화를 해석하는 하나의 관점이라면 어떤 틀을 갖춰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탈계몽론자들의 중요 개념들을 통해 그러한 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틀은 일상언어일 것으로 가정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중요 개념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 봄으로 그러한 가정에 도달하고자 한다. 먼저 료타르는 비트겐슈타인 언어철학을 수용하여 언어란 ‘언어게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데카르트나 칸트가 상정했던 보편적이고 단일한 개념 언어 체계의 전통을 거부하고, 인간의 다양한 방식의 언어게임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논리학이나 전통적 과학에서는 지칭적 언어게임을 하지만, 각종 문화, 정치, 사회, 체육,  종교에서는 다양한 담론적 언어게임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에 기초하여 료타르는 ‘포스트모던’을 모더니즘이 갖고 있는 ‘담론철학에 대한 불신’으로 특징짓는다. 단일한 보편적 언어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데아적 개념언어라면, 다양한 담론 언어는 사람들의 삶에서 구사되는 일상언어들인 것이다.
탈계몽에서 많이 논의되는 개념 중 하나는 ‘동일성’이다. 동일성은 지칭적 언어게임에서는 출발점인 동시에 핵심이다. 대상의 동일성 기준 없이 그 대상은 동일화될 수 없고,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담론 언어게임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푸코는 사물들의 역사적 기원에서 보이는 것은 그 사물들의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동일성이 아니라 다른 사물들과의 차이들이고 불화들이라는 것이다. 인식이란 개체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의 지식은 인간의 내면에서가 아니라 실천적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동일성이 현저하게 적용되는 주체의 개념도 언어게임으로 조명된다. 들뢰즈는 개별성이란 자아나 자신의 특성이 아니라 그 자신을 영원히 분할하는 차이의 특성이여서, ‘나’라는 지시사도 의식의 통일이 아니라 복제품들의 한 다중성을 동일시되는 주체 없이 지칭한다는 것이다. 료타르는 모더니즘의 이론 언어로 주체는 동일성의 정합성으로 이어지지 않는 주체성의 이질적 계기들로 분산됐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속적 담론의 복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반복, 흔적, 자취, 언어 해체, 계보, 은유 언어 등의 어휘로써 모더니즘의 동일성, 현존, 인식적 확실성, 단일체계 언어, 지칭, 주관성, 개성, 의미창조 등의 어휘를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실재해체’나 진리의 개념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존재를 ‘증발하는 실재의 마지막 숨결’이라고 말하여 실재와 가상의 구분이 해체된다는 것을 언급한다. 반복되는 것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실재도 아니고 가상도 아니라 환영이나 복제품이라는 것이다. 바디우는 진리가 단일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이(the between) 주체로 보고, 주체는 독백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둘’(the Two)로 일어나는 주체로서 언제나 대화의 상대를 필요로 한다고 본다. 바티모는 세계사를 보면 강한 의미의 단일한 목적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차이들과 부분적 목적들이 우리들에게 넘쳐 난다고 말한다. 이들은 미학적으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포스트모던의 진리는 예술이나 담론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보편적 이론은 현대 사회의 다원성을 소화할 수 없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일상 담론은 다자적 집합 주체성으로 그 다원성을 해명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체하는 또 하나의 어휘 집합이 있다. 즉 비역사화, 현재로의 시간통합 (Egyptianism), 기능적 반복, 복제품, 초현실성을 수용하고 전통적인 역사발전, 지식, 의미 단일성, 언어구성 같은 어휘들을 멀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어휘들은 연산적 ‘정보’ 개념 하에서 연결될 수 있다. 료타르는 인문과학의 담론위기가 컴퓨터 정보시대의 등장으로 닥쳐왔다고 생각한다. 보들리야르는 이러한 시대에서 기호나 이미지는 그 자체가 복제품으로서, 지시체가 없고, 어떤 실재와도 관계를 갖지 않는다고 본다.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은 상징적인 것으로 흡수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기호들은 기호들 끼리 거래를 하지 실재와 거래를 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이란 이제 다른 기호의 생산을 뜻하게 된다. 이러한 기호 교환의 체계는 이제 실재가 아니라 초실재가 된다. 보드리야르의 분석은 현대 일상언어에 들어 있는 문화 현상을 노출시켜주는 작업이라 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언어는 일상언어로 보인다. 이러한 정황 때문에 탈근대론자들 스스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론이 아니라고 말하고 하나의 이론으로 내세우거나 표현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탈근대론의 중요 개념들은 앞에서 살펴 본 언어게임, 동일성, 실재해체, 정보의 개념들이 보이는 것처럼 일상언어의 문맥에서만 수용될 수 있는 지평을 연다고 믿는다. 이 점을 두 가지로 강조해 보자. 첫째, 탈근대의 비지칭적 언어론은 비트겐슈타인의 사용적 언어론과 맞물려 있다. 언어의미를 지칭으로 확정할 수 있는 그러한 사실은 없으며 언어의미는 언어 공동체의 사용으로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둘째, 탈근대의 실재해체론은 비트겐슈타인의 매듭풀기로서의 철학관과 같은 처지에 있다. 비평가들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라는 비판을 탈근대론 뿐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에게도 적용한다. 그러나 답변은 일상언어로 살면 되는 것이지, ‘대안’이라고 제시해 이와 다른 관점을 배제하는 태도는 옳지 않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관점을 무시하지 않는, 대안의 부재야 말로 서로 주체성의 올바른 길이고, 일상언어가 인간역사에서 발전하고 지속해 온 문법이었을 것이다.

IV 비판의 분석

칼럼 저자 이교수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위에서와 같은 일상언어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상정할 때 보다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하버마스의 경우를 보자. 하버마스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선명하고 논리적이고 본질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개념 없이 비판하고자 하는 비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개념 구성 없이 그 이성, 주체, 진리, 실체, 언어 등은 비판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이러한 비판은 너무 형식주의적이다. 하버마스의 논리에 따르면 역사학자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묻는 것은 자기 모순적 물음이 되고 만다. 자기가 포함되어 있는 역사에 대해 그 물음을 묻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의 오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일상언어성의 논리를 간과한 것이다. 일상언어는 모순되는 많은 담론들을 수행해 가면서 자기 수정적으로 완성해 가는 도상의 언어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러한 일상언어의 문법을 따르는 것이다. 만일 포스트모더니즘이 완성된 이론체계였더라면 하버마스의 비판은 정당했을 것이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 논제로부터 몇 가지 관찰을 첨가해 다원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의 결론을 끌어내고 객관적 언어는 힘을 잃어 객관적 진리는 증발한다는 명목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한다. 이 어휘들을 탈계몽론자가 제안하는 해석에 따라 이해한다면 수용이 불가능하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의 ‘객관적 진리’는 탈계몽론자에게 ‘보편적 진리’로 이해돼 거부될 것이다. 그 단어 자체가 전통적으로  함의해 왔던 완결성, 수정불가능성, 단일한 형이상학적 체계 같은 함축이 전제되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언어에서도 ‘객관적 진리’라는 단어를 그러한 함축으로 사용한다면 탈계몽론자가 아니어도 거부할 것이고, 그러한 함축이 없이 사용한다면 탈계몽론자도 수용할 것이 아닌가?
저자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중에서 ‘언어 결정론’ 논변은 선명하면서도 동시에 의문스럽다. 먼저 탈계몽론이 전후 문맥을 보아 언어결정론을 수용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탈계몽론에 언어결정론을 귀속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귀속의 근거는 인간을 ‘언어 감옥에 갇힌 죄수와 같은 존재’라고 표현한 메타포이다. 그러나 언어결정론이 보다 힘을 얻기 위해서는 보다 설득력 있게 제시돼야 한다. 달리 말해, 인간의 행위에서 특정 언어 지향적 사건을 법칙에 따라 인과연쇄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 설명돼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의 가능성은 요원하기만 하다. 탈계몽론자가 그러한 설명을 추구할 수는 더욱 없을 것이다. ‘결정론’이라는 단어를 여러 관점에 접미어로 첨가하는 것은 논의를 강화하기보다 약화시킨다. 표면적으로는 논의를 선명하게 하는 것 같지만 내용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든다. 어떤 인간도 일상언어로부터 벗어날 수 없지만 일상언어의 ‘수인’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일상언어는 열려 있는 구조이고, 일상언어의 의미론은 지칭적이 아니라 사용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간 화자는 자신의 믿음 체계로부터 언제나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살을 못하게 하는 기계적 언어는 아직은 없다.
저자의 관심은 역사 실재론에 입각한 단단한 인문학의 기초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문학 실재론에 위협이 된다고 보이는 탈계몽의 비실재론을 비판하였다. 그러한 비판이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의문이다.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비판이 성공적이어도 인문학 실재론이 확보되는가의 과제가 남아 있다. 저자는 역사 실재론을 확립하기 위해 가장 많은 시간을 역사주의 비판과 설명적 해석학에 투여했지만 역사 언어론에도 주목했었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인문학 실재론을 옹호하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지만 인문학의 언어론에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상언어론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V 포스트모더니즘의 일상언어 형이상학

칼럼의 저자와 하버마스가 포스트모더니즘을 가장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일하게 완성된 이론 체계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만일 그러한 간주가 정당하면 이들의 비판은 훨씬 설득력이 있고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시작된 이론체계로부터 벗어나 담론시대로 나아가자는 운동이다. 즉 포스트모더니즘 자체를 이론화하지 않는 것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적 이론언어에서 일상적 담론언어로 전환한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분야에서 지칭적 언어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여 그 분야들을 담론화하고 있는 것이다. 탈계몽가들은 그러한 담론화 과정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장애들을 해체해 왔다. 이론의 시대에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하리라는 믿음으로 새 이론을 구성하거나 이를 쫓아 다녔다. 그러나 이제 담론의 시대에는 개인의 자서전이 의미 있는 자유의 이야기가 되고,  공동체의 삶의 이야기는 그 성원들이 구원받는 담론이 되는 것이다. 거대 이론에서 작은 담론으로의 전환은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저자가 인문학 실재론을 지키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의 목표로 선택한 것은 이해할만 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전통적 실재의 개념이나 그에 입각한 모든 종류의 실재론적 장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포스트모더니즘이 전통적 의미의 단일한 보편적 이론체계로서 제시됐다면 저자의 전략이나 비판은 성공적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오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전통적 실재론을 거부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에서 비실재적 어휘들을 구사한다고 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삶의 실재에 닻을 내리지 않고 있다고 단정한 것이다.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상언어의 다원적, 개방적, 과정적 운동을 통해 이 언어가 소통하고 통합하고 조정해 가는 과정자체가 이미 주어져 있다고 상정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일상언어의 실재론적 형이상학으로 장착돼있다. 그리하여 인문학 실재론은 인문학 내에서 이뤄지는 그 많은 모순되는 발설과 갈등적 토론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소통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일상언어의 굳건한 실재성을 통하여 언젠가 서로 어우러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일상언어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러한 신뢰 때문에 결과적 어울림을 지상과제나 담론의 목표로 나타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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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은 2019-04-29 02:05:21
본문에 등장하는 '유해명제'란 무엇인가요? '유해'의 한자(漢字)라도 알려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