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는 <교수신문> 905호에 「인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제목으로 한 원로칼럼을 기재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했습니다. 이 칼럼을 읽은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좀 더 심도 깊은 토론을 제안한다며 「이한구 교수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을 분석한다」는 기고문을 보냈습니다. 편집국은 50매에 달하는 원고 전문을 <교수신문> 907호 1, 8면에 나뉘어 실었습니다. 학계 원로들의 성숙한 토론을 통해 교수사회에 건전한 토론문화가 꽃피우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리고 910호에서는 김광수 전 한신대 교수(분석철학)가 이한구 교수의 입론, 정대현 교수의 반론을 메타철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본 「포스트모더니즘과 철학의 소임」으로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이번호(913호)에서는 정대현 교수가 김광수 교수의 글에 언어철학적 반론을 펼칩니다. 정 교수는 김 교수의 글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비판인 동시에 격렬한 선전포고”라고 규정합니다. <교수신문> 다양한 분야의 선생님들께서 학술토론에 참여하시기를 기대합니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I 문제제기
김광수 전 한신대 교수는 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교수신문> 905호)과 필자의 「포스트모더니즘 옹호」(<교수신문> 907호)를 평가(<교수신문> 910호) 하면서도 자신의 관점을 실질적으로 제시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모더니즘은 한국 지성계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소개 되고, 현대 문화를 조명하는 패러다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모더니즘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가?”와 같은 논의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두 관점의 배타적 차이가 치열하게 논의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러한 문맥에서 자신의 입론을 세우는 김 교수의 평론은 배타적 선택지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 주고 있다.
김 교수의 글은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몇 가지만 언급해 보자. 그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대부분 균형을 유지하면서 수긍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정확성에서 아쉬운 점들이 있지만 자신의 논의를 세워가는 문맥에서 이해할 만한 것이다. 김 교수는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들 중 다원주의의 장점을 확실하게 부각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해방적 요소를 가지고 있고 독단과 편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하고, 특정한 사상이나 이념의 포로가 되는 것이 어리석다는 깨달음을 주고, 다른 삶의 양식에 대해 관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정치적 포퓰리즘이 포스트모더니즘에 기반한다는 논의에 대해, 정치적 포퓰리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전제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일방적 매도의 오류를 비켜 간다.
그러나 김 교수의 글은 또한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을 가지고 있다. 지면의 제한 때문일 수도 있었겠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원주의나 상대주의를 통해 독단 해방이나 관용에 이를 수 있다고 하면서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는다. 더욱 의아한 것은 논의 없이 이들을 무시하거나 폐기한다는 점이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론 간의 연결성에 주목하면서도, 언어 게임이 전제하고 있는 공동체성이나 생활양식이 보전하는 객관성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하여 언어 게임 개념에 들어 있는 자의성 요소를 활용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천부인권 같은 것은 없고, 이 말이 사용되는 언어게임이 있을 뿐”이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의 법칙 탐구를 원칙적으로 무의미하게 보고, 철학은 파산했다고 볼 것이라는 결론에 쉽게 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김 교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삶의 현장에서 “할 말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향하여 사망 선고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는 김 교수의 글에서 보이는 불편한 점들을 여기에 모두 나열하여 토론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그가 지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독단 해방이나 관용 미덕이 어떻게 그가 지향하는 모더니즘에 연결될 수 있는가? 언어게임을 논의하면서 사용의미론이나 생활양식의 중요성은 언급하지 않고 어떻게 그 유희성에만 주목할 수 있는가? 생활인들이 진선미를 추구한다면 이는 모더니즘적 사고에 제한적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나 상대주의를 비실재적이라 해야 한다면 그 비실재성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추리되는가? 모더니즘적 프레임에서 사용되는 ‘실재’라는 표현은 ‘이것’ 같은 색인사처럼 통이론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인가?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모든 의문들을 달리 논의할 기회가 오기를 기대한다. 이 글에서는 특정한 물음 하나에 주목하고자 한다.
II ‘체계’의 두 의미
주목하고자 하는 물음 하나는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김 교수는 글에서 ‘이론’, ‘관점’, ‘언어’, ‘게임’, ‘주의’, ‘사상’과 같은 표현들을 사용한다. 이들은 ‘체계’라는 표현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문맥에서 서로 대치 가능하므로 여기에서는 ‘체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는 모더니즘을 본질주의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원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필자는 이 규정을 수용하여 양자의 차이를 보다 선명하게 보이고자 한다: 모더니즘은 “세계에 대한 참 기술 체계는 유일하다”고 믿는 관점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에 대한 참 기술은 다수이다”라는 관점이다. 여기에서 ‘체계’라는 표현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기술하기 위하여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유일’하다는 체계와 ‘다수’라는 체계가 엄밀하게 구분될 때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구분도 명료해 질 것이다.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김 교수가 놓치고 있는 바로 이 점이다. 즉 그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모든 체계들은 대부분 평면적으로 대치되는 사유의 틀이 아니라 언어적 구조가 입체적으로 맞물린 사유의 틀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유일’ 체계의 모더니즘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나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으므로 나의 존재의 확실성은 이성에 의해 증명된다고 간주됐다. 모더니즘은 이성 언어의 유일성과 확실성에 기초한 인식론이고, 존재론이고 형이상학이다. 달리 말해, 모더니즘이 전제하는 것은 인식적 객관성, 존재론적 보편성, 형이상학적 실재성은 동형적 구조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틀을 “인식대상의 조건과 대상인식의 조건은 동일하다”라는 인식의 선험성 논변을 통해 확립 하고자 했다. 태양이 하나이듯 세계의 진리 체계, 참 진술의 체계는 하나라는 것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은 뉴턴 물리학에 의해 확인되면서 개체 정체성의 확실성이 절대적 시간 공간에서 확보될 수 있다고 믿었다. 역사 진행은 그러한 질서에 따라 낙관적이었고, 과학은 그러한 형이상학에 따라 도도한 발전을 기대하게 됐다.
‘다수’ 체계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으로 흔히 조명되지만 또한 ‘진리’ 또는 ‘참’이라는 표현의 사용 방식에 의해서도 설명된다. ‘참’은 인격이나 의도를 수식할 때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문장을 수식하는 술어이다. 그리고 문장은 특정한 언어 체계의 성원이다.
따라서 특정 문장은 어떤 체계에 속하는가에 따라 진리치가 달라진다. 진리가 체계 의존적인 것이다. “빛은 직진한다”라는 기호열은 뉴턴 체계의 문장일 때 참이지만 아인슈타인 체계의 문장일 때 거짓이 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아인슈타인 물리학에 의해 지지 되면서 개체 정체성은 상대적 시간 공간에서 불확실하며 통계적인 것이 됐다. 즉 진리 다원성은 언어문법이고 소통을 위한 전제 조건이지, 관용을 목표로하는 성질은 아닌 것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유일 체계와 다수 체계로 차별화하는 것은 더 심화시켜 볼 수 있다. 이론과 담론의 구분을 도입해 보자. 이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이론의 단일성과 담론의 다원성이라는 언어적 속성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20세기 이전의 사상 체계들은 거의 모두가 절대주의적이라는 점에서 배타적이고 자체 충족적이라는 의미에서 단일적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인간 사유의 언어적 성격이 밝혀지면서 개인 마다 통전적 관점의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그 개인들이 속한 공동체 성원들이 공유하는 구조에 의해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수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단일적 이론의 모더니즘과 다원적 담론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보다 자세하게 논의돼야 할 것이다.
III 모더니즘의 체계-단일 이론
김광수 교수는 ‘네 개의 특징’으로 모더니즘을 규정한다. △인간이성은 불변의 확실한 진리에 이르게 한다 △불변의 진선미 같은 가치는 본질주의적 실재를 확보 한다 △과학주의의 계기를 마련하여 탈미신화에 기여한다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진보적 낙관주의를 허용한다. 이러한 네 가지 속성들은 모더니즘을 기술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 ‘특징’이라고 하기에는 빈약하다. 유일 체계로서의 모더니즘이 갖는 언어적 성격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은 세계를 기술하는 참 체계는 유일하다는 언어적 단위로서 ‘단일 이론’이라 불릴 수 있다. 이 절에서는 ‘유일 체계성’외에 언어적 단위로서 모더니즘이 갖는 두 가지 특징을 살펴보고, 모더니즘이 갖는 지성 논리로서의 유용성과 한계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모더니즘이 갖는 언어적 단위로서의 특징 하나는 “다원주의란 불가능하다”라는 메타적 성격 규정이다. 모더니즘은 유일 체계이기 때문에 정의상 다원주의를 용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새로운 이론들을 제안하고 있다. 모더니즘은 이들에 대해 여전히 “세계를 기술하는 참 체계는 유일하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일한 참 체계에 가기 위해서 경쟁적인 이론들을 비교, 평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론들은 통사론에 따라 기호, 공리, 규칙들 중 어느 한 요소가 달라도 다른 이론이 된다. 콰인-두헴이 지적했듯이, 세계를 만나는 언어 단위는 낱개 문장이 아니라 문장들의 집합으로서의 이론이다. “빛은 직진한다”라는 기호열이 바로 세계의 부분을 독립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 기호열이 속해 있는 이론이 통채로 세계를 만나게 되고 그에 따라 이 기호열은 참 문장이기도 하고 거짓문장이기도 한 것이다. 이론들은 제 각기의 목적에 따라 세계를 만족스럽게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토마스 쿤이 주장한 것처럼, 다원주의적 이론들은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인지를 비교할 수 없는, 통약불가능한 것이 된다.
모더니즘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인간 주체는 홀로 주체적이다”라는 믿음이다. 인간 주체는 어떤 것도 의심할 수 있지만 자신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는 유일한 확실성의 지표이고 세계인식에서 선험적 종합판단의 수행자이다. 인간 주체는 확실성과 선험성의 주체인 점에서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홀로 주체가 된다. 객관성, 실재성, 보편성의 동형적 구조를 신봉하는 합리주의 단일 체계는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의 홀로 주체성에서는 “나는 내가 믿는 것을 모를 수 없다”라는 심성 내용의 全知性 논제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논제를 거부하면 홀로 주체의 확실성과 선험성은 붕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더니즘을 보편적 틀로 수용하는 사람은 심성 내용의 전지성 논제를 지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네 마음에 대해서는 너 자신보다 그가 더 잘 알 수도 있어”라는 문장이 시사하는 심성내용의 외재주의가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전지성 논제가 위협받는 것이다.
김 교수와 필자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속성과 단절성에 대해 다른 관점을 취한다. 필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지해 보편적 틀로서의 모더니즘은 거부하지만 특정 주제의 설명을 위한 문제 해결적 모더니즘은 지지한다. 수학 같은 형식 과학은 모더니즘의 계산적 이성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교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의 일관성 있게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보편적 틀로서의 모더니즘에 대해 논의로써 지지하지도 않고 비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모더니즘적 일상인’이라는 표현을 만들고 긍정해 모더니즘을 수용하는 것 같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모더니즘을 언어 개념적 어휘가 아니라 시대 문화적 현상으로 파악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모더니즘을 위에서와 같이 유일 체계, 다원성 부정, 서로 주체성 부인 같은 언어적 특징으로 규정한다면 그 문제성은 명약관화한 것이 아닐까? 모더니즘의 현대 철학판이라 할 수 있는 유일 체계론으로서의 진리대응론을 어떻게 지지하고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아직도 진리는 유일 체계적이어야 하므로, 진리는 거울 반영처럼 우리 의식에 명석하고 판명하게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고 할 것인가?
IV 포스트모더니즘의 체계_다원적 담론
김 교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도 공평한 기술을 한다. 그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원주의를 통한 해방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모더니즘에서와는 달리 언어적 특성을 통해 이해하고자 한다.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어를 게임이라 한다. 언어는 자연의 거울이 아니라 언어 게임에서 사용되는 도구라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제일원리로서의 이성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본질이나 법칙적 구조에 대한 탐구는 원칙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된다. 지식의 총체는 ‘인간이 만든 직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관에 의해 영향 받은 철학은 존재론적 상대주의, 해체주의, 지적무정부주의 등에 경도되고, 진리 탐구로서의 철학의 종언을 고하는 철학자까지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교수는 공평하긴 하지만 언어적 특성을 충분히 부각하지 않은 면이 있다. 그 몇 가지 특성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리오타르는 비트겐슈타인을 따라 언어를 게임으로 말하면서 미시서사의 작은 공동체들을 언급한다. 언어의미는 자연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사용방식이라는 일상언어철학의 논제를 수용하는 것이다. ‘좋다’나 ‘나쁘다’가 자연의 어떤 물리적 속성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어서 실체적으로는 허구적이지만, 공동체의 술어 사용방식을 나타내는 서술성을 유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윤리적 가치 술어만이 아니라 모든 언어 어휘들에 적용된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사용의미론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언어 게임의 ‘게임’은 그 유희성 보다는 유일 체계성에 대조되는 다수 체계성을 나타내는 메타포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료타르가 작은 공동체의 언어 게임은 많은 사람들의 복지나 해방에 표적이 맞추어져 있다고 말한 것은 일상언어가 다양한 공동체들에 의해서 긍정적으로 발전되고 가치가 수렴돼 감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둘째 특징은 언어가 공동체적이라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언어가 홀로 주체적이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언어는 의미가 사용적이고, 사용은 공동체적이라는 점에서 서로 주체적이라 할 것이다. 바디우에 의하면 모더니즘의 주체는 독백하는 것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체는 언제나 사이(the between) 주체이고 ‘둘’(the Two)로 발생해 담론에 참여하는 대화 주체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많은 경우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말한다. 마음의 내용은 혼자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엮어지고 공동체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심성 내용의 외재주의가 인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서로 주체성은 홀로 주체성이라는 질병에 대한 처방일 뿐 아니라 인간 본연의 연대성에의 복귀이다. 서로 주체가 언어 공동체에서 대화하는 담론은 서로의 슬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며 확장하여 서로를 세우는 행위가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또 하나의 언어적 특징은 담론적 다원주의를 통해 보여 질 수 있다. 앞에서 본 이론적 다원주의의 체계들이 통약불가능성으로 특징지워 진다면, 담론적 다원주의의 체계들은 소통가능성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론 체계가 인간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해 그 안에서 화자-청자를 배제하고 있다면, 담론 체계는 그 체계의 성원들의 <독립적 관점 체계>를 허용하면서도 성원들이 <공유하는 교차 체계>를 통해 담론 소통을 요구한다. 부모자녀로 이루어진 한 가족은 네 식구의 관점 체계들을 독립적으로 각기 허용하면서도 이 가족이 공유하는 교차체계를 유지한다. 모든 체계들은 모더니즘에서와 같이 평면적으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에서와 같이 그 언어적 구조가 입체적으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담론 체계는 담론의 창조성과 흥미를 위해 개성을 요청하고, 그 결과로 인간 연대는 공고해지고 확장되는 것이다.
V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재성
김 교수는 “대다수의 생활인들은 진선미 같은 가치를 모더니즘적 신념으로 산다. 왜냐하면 실재론을 전제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김 교수의 이 생각은 “포스트모더니즘은 비실재적이다”라는, 그가 언명하지 않은 채 주장하는, 명제의 오류의 근거가 된다. 그 오류의 논리는 다음의 네 명제로 구성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종의 다원주의이다. △다원주의는 다수 체계적이고 상대주의적이다. △상대주의는 진리가 문장이 속한 체계에 의존적이라고 믿는다. △진리의 다원적 체계의존성으로는 실재를 표상할 수 없다. 이러한 네 전제에 의하여 오류의 결론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비실재적이다”가 도출되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됐는가? 처음의 세 전제는 정당하지만 네 째 전제가 잘못된 것이다. 네 째 전제는 진리의 인식론적 차원과 실재의 존재론적 차원을, 대응론적 진리론에서 처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동일시를 거부해야 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진리란 사태에 대한 국면적 기술에 따라 다원적으로 표상되는 것이고 실재란 언어 기술이 접선적(tangential)으로만 닿아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재성 여부는 조금 더 논의 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떤 의미에서 실재적인가? 이 논의에서 걸림돌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세계를 기술하는 어휘들이 ‘불확정적’, ‘모호’, ‘비단정적’, ‘비결정적’ 일 뿐 아니라 아예 ‘진리’, ‘모순율’ 같은 것을 보편적 인식 기준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러한 어휘만으로도 전통적 모더니즘의 실재론적 관점에서는 ‘비실재적’이라고 판정하기 쉽다. 그러면 여기에서 논의를 종결할 것인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 등의 언어철학은 일상언어 안에서 다양한 언어 게임이 올바르게 구성되고 사용되고 소통된다고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구사하는 어휘들은 오히려 일상언어의 행태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일상언어의 형이상학에 기대어 일상언어가 역사적으로 유지해 주었던 언어와 실재와의 든든하고 강고한 연대를 확인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일상언어는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공동체의 사용에 의해 구성되었는데도, 일상언어 형이상학의 실재성은 공동체를 통해 인간 언어 역사만큼이나 오래 유지되고 신뢰돼 온 것이다.
일상언어 형이상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재성을 일반적으로 보여주지만, 일상언어의 ‘이것’이라는 색인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재성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준다. 이 색인사는 같은 것을 달리 말할 수 있는 장치이다. 사람들은 다른 이론 체계나 담론 체계들에서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지만, 이 색인사를 통하여 결국 “같은 이것에 대해 저렇게 달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관점을 ‘다원주의적 실재론’이라 하겠다. 색인사의 이러한 활용 가능성은 한편으로 다원주의, 상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패러다임론의 주요 주장들을 수용하면서도 인문적 사유의 풍부성을 산출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 언어가 말해지는 것의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기초로서의 동일 실재성의 장치가 된다. 달리 말해, 인간 사회는 언어의 다양한 사용을 통해 표면적으로 ‘유일 체계성’을 해체하고 있지만, 심층적으로 풍부해지고 있으며, 개인주의의 ‘원자적 파편화’ 속에서도 공동선 같은 객관적 기초를 통해 인간 연대의 구조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김 교수의 글을 읽은 나머지 소감으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강한 어조로 부인하면서도 그 자신 포스트모더니즘적 향수를 나타내 보인다. 모더니즘은 애매모호한 일상언어를 혼란스러운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유일 체계로서의 이상언어를 목표로 하는데도, 그는 <모더니즘적 일상인>의 삶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념적으로 비일관적인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표현으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조화를 꿈꾸는 것일까? 예술가의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더니즘이 예술가의 마음을 허용할 수 있을 때 그의 꿈은 존중될 수 있을 것이다.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