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 여름날
지지 않는 여름날
  • 한소라 숙명여대 대사세포생물학연구실 연구교수
  • 승인 2017.11.0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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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한소라 숙명여대 대사세포생물학연구실 연구교수

11년 전 이맘 때, 날이 꽤 쌀쌀했다. 어쩌면 긴장감에 손발이 차가워져 실제보다 더 추웠다고 기억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순간이 내 연구 인생에 가장 뜨거운 날이 아니었을까. 순수한 열정에 불타는 가슴을 안고, ‘연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리라!’ 하고 당당히 연구실에 합류하게 된 그 날. 그렇게 나는 연구실 인턴이 됐고, 어느덧 지금은 3년차 박사 후 연구원으로 여전히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다시 생각해본다. 11년 전 그토록 뜨거웠던 가슴은 여전히 안녕하신가? 이토록 오랜 시간 답을 생각하는 자문(自問)은 오랜만이다. 무엇이 부끄러운지, 나는 그 답을 쉽게 말할 수 없다. 20대를 연구실에서 밤낮으로 보내며 열심히 실험하고 그 결과로 논문을 게재했고, 학위를 받았다. 내가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면서 목표했던 일들을 다 이뤘는데도, 이따금씩 나의 가슴은 허전하고, 외롭고 또 공허하다. 이렇게 식어가는 열정과 순간적으로 엄습하는 두려움. 이대로 나는 괜찮은가? 아니, 사실 우리 모두 솔직히 스스로에게 같은 물음을 던져보자. 우리 모두는 괜찮은가? 이것은 나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느끼는 과학자로서의 흔한 심경이리라.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보다 실패를 많이 하고 또 그 때문에 좌절을 많이 해야만 하는 ‘과학자’이기 때문이다.

요즘 과학의 성과는 논문이라는 결과물로 성패가 이뤄진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인용지수(impact factor)가 높은 저널에 실험결과를 논문으로 게재하기 위해 과학자는 부단한 노력을 한다. 그 노력 속에서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기술미숙으로 실험에 실패할 때 느끼는 굴욕과 좌절, 굳게 믿었던 가설이 옳지 않음을 알았을 때 하늘이 머리 위로 무너지는 느낌, 공들여 완성한 원고가 논문 에디터(editor)로부터 번번이 낙방을 맞을 때 벌거숭이가 된 기분은 큰 아픔을 준다. 과학자에게 이러한 일련의 아픔은 ‘반복적’으로 겪어야 하는 숙명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처음에는 열정적으로 실패에 대항하다가, 결국엔 적응하게 되고 실패를 회피하고자 지름길 생각만 하게 된다. 겪어야 할 과정은 철저히 외면한 채 목적지만 바라보고, 한참 남은 길에 놀라 한숨만 쉬는 것이다. 그렇게 가슴은 서서히 식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불이 잠시 수그러들었을 뿐, 그 불씨는 여전히 선명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각종 시약 냄새가 나는 연구실에서 하얀 실험 가운을 입고 앉아있는 것 자체로 스스로 대견하고 뿌듯했던 시절, 몇 달 만에 실험에 성공해 교수님과 모든 연구실 선후배가 다 같이 모여 박수 쳐 주시던 그 순간의 짜릿함, 정교한 실험은 아니었지만 정성 들여 작업한 나의 첫 프로젝트가 내 생에 첫 논문으로 게재된 날, 온 가족과 교수님, 연구실원이 축하해주던 그 감격적인 순간! 그 순간 느꼈던 기쁨의 크기는 그 어떤 인용지수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벅찼다. 그래서 나는 연구가 힘들 때마다 과거의 나를 찾아간다. 여전히 순수하고 뜨거웠던 과거의 나는 항상 그 자리에 있고,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잠시 스스로를 배반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 그리고 그런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위로를 건네고 용기를 준다. 다 잘될 거라고, 처음 그 순간처럼, 네가 하고 싶은 연구를 재미있게 하면 된다고.

그렇다. 요새 방영되는 프로그램 제목을 인용하자면, ‘세상에 나쁜 연구주제는 없다’라고 생각한다. 저녁 뉴스에 ‘OO대학 OO연구팀, 세계최초로 OO를 규명해 세계적 과학잡지 OO에 소개되어’라는 업적만이 성공한, 그리고 훌륭한 과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막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새싹 연구자로서, 옛날부터 관심이 많았고 꼭 한번 연구 해보고 싶었던 주제인 ‘스트레스’와 ‘노화과정’으로 한국연구재단 학문후속세대 리서치펠로우 과제를 수행하게 됐다. 그러면서 내가 하고픈 주제로 연구를 수행하는 재미를 느끼고, 꺼졌던 가슴 속의 불씨가 다시 커지고 있다. 좋은 논문을 개제하는 것만이 과학자의 소명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면, 꺼져가던 우리의 연구애(愛)를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11년 전 그 날처럼 날씨가 쌀쌀하다. 다시 겨울이 오고 있다. 하지만 우리 가슴 속에는 미어지도록 아름답고 순수하게 뜨거웠던, 영원히 지지 않을 여름날이 항상 있다는 것을 모든 학문후속세대 과학자들이 기억했으면 좋겠다.


 

 

  한소라 숙명여대 대사세포생물학연구실 연구교수
  숙명여대에서 분자생명시스템 전공으로 박사를 했다. 분자세포생물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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