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경에 처한 민주주의…민주체제 수립과 평화적 국제질서 구축은 가능한가?
곤경에 처한 민주주의…민주체제 수립과 평화적 국제질서 구축은 가능한가?
  • 배경한 신라대 교수(역사문화학과)
  • 승인 2017.10.30 20: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배경한 신라대 교수가 보는 「역사적 전환기로서의 동아시아 근현대사」

세계사 내지 지구사의 관점에서 볼 때 근현대 동아시아 역사는 하나의 거대한 전환기에 해당한다. 서구 열강의 침략(西勢東漸)과 그에 이은 동아시아 지역의 식민지화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민주주의를 비롯한 서구적 질서가 동아시아에 밀려들면서 문명적 단위의 전반적 ‘전환’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흔히 근대화, 서구화, 혹은 동서문화의 융합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러한 ‘전환’ 가운데 전반적 영역에 걸쳐 서구적 체제와 가치에 대한 대응과 수용, 변용이 광범하게 전개됐던 것이니 동아시아로서는 전통적 질서로부터 새로운 체제, 질서로 이행하는 ‘역사적 대전환’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근현대 동아시아가 겪게 된 ‘역사적 대전환’ 가운데 새로운 목표(이상)으로 내세워졌던 것들은 부강과 독립, 평등, 민주 등이었음이었다. 이러한 목표들은 당초, 식민지로의 전락이라는 망국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안으로서 제시됐지만 근현대의 역사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공동의 선’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지속적으로 추구돼왔던 만큼 현재까지도 목표로서의 의미를 여전히 갖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근현대 동아시아 역사가 당면하고 추구했던 이들 목표 가운데, 오늘날까지도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민주 내지 민주주의의 문제를, 그것이 가지는 ‘이상’과 ‘현실’의 관계라는 측면을 중심으로 다룬다. 이런 논의는 오늘날 한국사회 뿐만 아니라 전체 동아시아가 경험하고 있는 정치적 보수화와 그에 동반된 ‘민주주의의 위기’를, 역사적 전환기라는 보다 넓은 관점에서 돌아보면서 민주적 변혁의 방향에 대한 역사적 시각을 모색해보는 의미 또한 가질 것으로 기대된다.

‘변혁’에 직면한 한국사회

오늘날 한국사회는 ‘변혁’이라는 절대적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변혁’은 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비롯된다. 한국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위기는 크게 봐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심각한 비민주적 정치행태와 경제의 독과점체제로 나타나고 있는, 국내적 정치경제 체제의 문제로서 정치 경제적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다른 하나는 두 강대국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 대립으로 노골화되고 있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위기로서 한반도를 둘러싼 평화적 국제질서의 위기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위기는 구조적으로 매우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국제적 패권주의의 강압적 영향력 아래 국내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손상 받는 경우는 자주 발견된다. 예컨대 20세기 초부터 본격화된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체제는 국가적 독립과 부강을 최고의 목표로 삼도록 만들면서 민주적 발전을 지체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맡았다. 또 20세기 중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동아시아의 냉전 체제 또한 반공이데올로기의 위협 아래 군사 독재체제를 온존시키는 기본적 조건을 제공했으며 그 결과로 국내 민주주의가 지체되거나 왜곡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는 반대로 국내 민주주의의 곤경들이 국제적 평화 체제 구축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음 또한 사실인 것이다. 요컨대 국내적 민주주의와 국제질서는 밀접한 상호 연결,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

두 위기의 출발점

우리의 시야를 한국 중국 일본을 범위로 하는 동아시아의 근현대 역사로 돌릴 경우 이 두 가지 위기의 출발점, 곧 민주적 정치 경제 체제의 수립과 평화적 국제질서의 수립은 19세기 중엽 이래로 전체 동아시아가 지향했던 ‘변혁’의 가장 중심적인 ‘목표’였다. 그렇다면 현재의 이러한 위기는 한 세기가 넘도록 추구해온 ‘변혁’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인가? 진정한 민주체제의 수립과 평화적 국제질서의 구축은 결국 하나의 ‘이상’에 불과한 것인가? 어떤 역사적 ‘현실’이 변혁의 ‘목표’를 왜곡시키고 좌절시켰는가?

이제 우리 역사학자들은 이 물음에 진지하게 대답해야 할 의무를 앞에 두고 있다. 60회를 맞는 전국역사학대회 또한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자리가 되어야 마땅하다. 모든 학문은 시대와 사회에 대한 복무를 일차적인 의무로 가지는 것이지만, 특히 시대의 방향을 점검하고 모색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역사학의 경우 시대와 사회에 대한 복무 의무는 더욱 크다. 4·19혁명 직후에 열린 제4회 전국역사학대회를 계기로 해 역사학의 시대적 소명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제기됐던 사실을 ‘촛불혁명’ 직후에 개최되는 오늘의 제60회 전국역사학대회에서 다시 돌이켜 보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역사학의 시대적 임무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 열강들의 침략과 식민지화로 시작된 동아시아의 근현대 역사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적 사회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삼는 일대 ‘역사적 전환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전화기 속에서 동아시아 각국은 부강과 독립, 평등, 민주 등을 공통의 목표로 삼아 왔으며 오늘날 동아시아 각국들은 이들 목표의 상당 부분을 달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일부 목표의 경우 아직까지도 달성이 아닌 현재 진행 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 ‘역사적 전환기’ 또한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터인데,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진행형의 목표(이상)로 정치 경제적 분야에서의 민주주의를 들 수 있다.

역사학의 역할

오늘날 한국, 일본,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이 심각하게 부닥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유교와 군주제로 대표되는 전통의 강고한 유산과 동아시아 지역을 둘러싼 강대국들 간의 수많은 대립과 갈등, 전쟁이라는 국제체제의 엄혹한 굴레 아래 구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봐야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정적 유산과 국제체제의 구조적 제약을 넘어서서 민주주의를 세울 가능성은 과연 있는 것인가? 과연 어디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와 근원적 동력을 찾아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역사학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역사적 경험과 현실적 여건 속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논의돼야 할 문제들은 매우 많고 다양하지만, 다만 여기서는 역사학의 역할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두세 가지 원론적 제안을 하는 것에 그치고자 한다. 첫째는 여러 가지 제약적인 조건들로 구조화된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엄중한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의 성장과 확립을 단기간에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자는 주장이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소개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 이래로 현재까지 동아시아의 민주주의가 직면했던 역사적 상황들에 비추어봤을 때 자칫 조급한 기대가 민주주의의 본래 목표를 흐릴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안팎으로 얽혀있는 제약적 상황의 구조적 성격으로 보아서도 그 해결을 일거에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긴 안목에서 본다면 민주주의란 우리 사회가 달성해야 할 변혁의 ‘목표(이상)’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과정’이라는 전망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역사학계가 나서서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확립을 단기간에 기대하기 어렵다는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궁극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의 수립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과 확신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전통의 부정적 무게와 국제체제의 엄혹한 압력 속에서도 역사의 결정적인 장면마다 나타났던, 역사의 진정한 주인인 민중(시민)의 민주주의를 향한 도전이라는 근원적 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근현대 역사 속의 태평천국과 오사운동, 천안문민주화운동, 그리고 한국 근현대 역사 속의 동학혁명, 삼일운동, 4.19혁명, 6월 항쟁, 광주민주화운동과 촛불혁명으로 면면히 이어져온 민중(시민)의 힘은 민주주의의 궁극적 성공을 전망하게 만드는 근본적 이유가 될 것이다.

나아가 국제체제의 굴레를 타파하기 위한 각국 민중(시민)들 간의 국제적 협력과 연대의 역사적 경험과 예컨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전반기까지 진행된, 반제(反帝)를 위한 동아시아 국가(민족)들 간의 연대는 당시의 식민지배 체제라는 국제체제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동아시아 민중(민족)들 간의 협력과 연대로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현재적 가능성 또한 민주주의의 확립을 확신하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세 번째 거론하고자 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사실, 곧 동아시아의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의 근원으로서의 전통의 무게라는 문제와 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체제의 구조적 굴레라는 문제, 그리고 이런 가운데서도 민주주의의 수립에 대한 장기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 그러한 전망과 가능성의 근원적 힘으로서 민중(시민)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역사연구와 역사교육의 중심적인 주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동아시아 지역 민주주의의 수용 발전과 관련하여 기왕에 나와 있는 역사학계의 연구가 적지 않지만 현재 동아시아의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를 생각할 때 역사학계의 일치된 분발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적 전환기’로서의 현재를 다루는 역사학자들의 시대적, 사회적 책무가 더욱 무거운 시점이다.


배경한 신라대 교수(역사문화학과)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저서로 『왕징웨이 연구』가, 주요 논문으로 「1910-40년대 한국인들의 쑨원, 삼민주의 이해」 등이 있다. 중국근현대사학회장을 역임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