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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행복
윤리와 행복
  • 신중섭 강원대
  • 승인 2003.04.28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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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신중섭
강원대·과학철학
나는 게을러질 때마다 ‘보디가드’를 본다. 이 영화는 심각한 인생 문제나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직업 윤리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프랭크 화머(케빈 코스트너)는 최고의 솜씨를 지닌 전문 보디가드다.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고 있는 인기 절정의 가수이자 배우인 레이첼 마론(휘트니 휴스턴)은 비싼 값으로 프랭크를 고용한다. 프랭크는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레이첼과 함께 보고, 레스트랑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는 안전하겠죠?”(레이첼) “목숨 걸고 덤비면 여기도 위험하죠.”(프랭크) “그럼 어떡해요?” “내가 대신 죽어야죠.” “나를 위해서?” “직업이니까.” “목숨을 건 직업, 왜 해요?” “난 노래를 못하니까.” “대통령을 위해 죽는다면 몰라도.” “당신은 어때서?” “별 볼일 없죠.” “원칙의 문제죠.” “무슨 원칙이건, 목숨을 걸다니!” “쉽진 않죠.” “하지만 당신은 한다?” “그런 셈이요.”
별 볼일 없는 자신을 위해 죽을 수 있느냐고 묻는 마론에 대한 프랭크의 대답은 간단하다. 자기를 고용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직업이기 때문에, 그녀를 위해 대신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태도는 왜 그가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62회나 반복해서 보고있는가를 설명해준다. 프랭크는 主君을 위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사무라이의 정신을 신봉하고 있는 것이다. 충성의 대상이 주군에서 자기를 고용한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레이첼은 시상식에서 살인 청부업자의 과녁이 됐고, 프랭크는 몸을 날려 그녀를 구한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고 자신을 고용한 사람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그는 행동으로 자신의 말을 지켰다. 원칙을 지키는 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를 묻지 않았으나, 원칙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프랭크는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랭크의 삶이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원칙을 지키는 것 곧 올바른 행동을 행복과 관련시키지는 않았다. 그는 올바른 행동만이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윤리관을 거부한 것이다. 이는 올바른 행동과 행복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이미 2천5백년 전에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에서 올바른 행동과 행복 사이의 관계를 간단하게 설정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설사 부정한 행위가 우리에게 많은 이익을 준다고 할지라도, 오직 올바른 행동만이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른 행동을 해야만 한다. 소크라테스는 부정한 행동, 올바른 행동, 이익, 참된 행복의 관계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물론 그가 부정한 행동이 항상 우리에게 이익을 주고, 올바른 행동은 항상 우리에게 손해를 준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올바른 행동이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우에도 올바르게 행동해야 할 윤리적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올바른 행동이 항상 우리에게 행복을 준다면, 인간이 윤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무로 부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올바르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이익을 누리고, 행복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윤리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올바르게 살면 결국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행복한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항상 올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德談이다. 그러나  불행한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올바르게 살지 않아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惡談이다. 소크라테스와 같이 행복을 미끼로 올바른 행동, 도덕적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이런 악담을 윤리적으로 정당화 할 수도 있다.
실제로는 부정한 행동이 이익을 줄 수도 있고, 올바른 행동이 이익을 줄 수도 있다. 이익이 행복을 보장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올바른 행동과 이익, 이익과 행복 사이에는 필연적 인과 관계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올바른 행동과 행복이 함수 관계에 있다는 주장은 오히려 윤리의 쇠퇴를 초래할 수도 있다. 윤리와 행복이 분리되면 될수록 우리는 행복에서 자유롭게 돼 윤리적으로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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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2003-05-26 14:27:27
얼마전 우리 정신 속에 있는 자연법의 존재를 출발로 하여 신의 존재를 논증해나가는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C.S. 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라는 제목의 책이다.

선악을 판단하고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이 개인의 생존가능성을 높여주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찰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에 보편적으로 자연법이 존재하고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이라는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고 이해하고 있다).

신중섭교수의 칼럼 역시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들이 자연법(여기서는 윤리적 의무)이 개인의 생존가능성이나 이익과 관련이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는 듯 하다. 소크라테스의 생각과는 달리 올바른 행동과 이익 또는 행복 간에는 필연적인 상관관계가 없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인간의 마음 속에 선악의 판단과 선을 지향하는 도덕률을 심어놓은 신의 존재를 믿는다. 그러나 그 도덕률의 존재를 통하여 신의 존재를 그토록 쉽게 논증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그러던 중 4월 19일자 학이사에 인류학자인 유명기교수의 칼럼이 실렸다. 그는 (내 으로 읽자면)인간의 윤리적 성향(우성열패의 원칙이 아닌 약자에 대한 배려)은 피상적으로 면 적자생존의 가능성을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사실상 인간 그룹 전체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순기능을 해왔다고 주장한다.

즉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윤리적 성향, 혹은 자연법의 존재는 자연선택이라는 진화의 법칙으로 설명가능한 것이 된다. 결국 유명기식의 주장에 따르면 자연법의 존재를 가지고 신을 증명하는 것은 난감한 일이 되고 만다.

물론 이 짧은 생각과 잠깐의 탐색만으로는 자연법이 과연 진화의 결과인지 진화와는 별개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성향인지를 밝힐 수는 없다.

그저 자연법에 대한 인류학자의 시각과 철학자의 상반된 시각을 읽을 수 있었기에 유익했음을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