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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와 평가
교수와 평가
  • 유제호 전북대
  • 승인 2003.03.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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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유제호 전북대 불어불문학 /
인간을 크고작은 평가의 주체와 대상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주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일상체 수준에서 볼 때 인간은 상시적인 평가의 주체·대상이다. 모든 사람들이 일정의 상호 평가에 바탕한 유대와 소외의 그물망 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런 가운데 또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시시각각 새로운 그물망을 구축하고 있다.

한편 공공체 수준에서 볼 때도 모든 사람들이 일정 평가의 주체·대상이 된다. 각급 선거와 각종 경쟁 시험이 그 대표적인 예다.(그런데 평가의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일상체와 공공체가 교차하는 사회체 수준에서는 더욱 그렇다.)
교수가 학기마다 평점을 매기고 이따금 교수 채용 심사를 하는 것도 전형적인 평가 활동이다. 아니, 이것이야말로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대표적인 평가 활동이다. 사실 교수의 평가가 엄정하지 않고 신뢰받지 못하는 사회는 심각하게 기형화되고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학생들이 각양각색의 이유를 들어 교수에게 감히 점수를 올려달라고 요구한다. 심지어 소신껏 엄정하게 평가를 하는 교수들을 상대로 여론 주도층 학생들이 ‘당신 과목이 유지되느냐 폐강되느냐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식의 위협을 하는 일도 생겨나고 있다.

꼭 종교나 신학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인간은 지극히 불완전한 존재, 모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가치는 그가 소유하거나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며 감수하는 진지한 노력에 있다”(레씽). 그런데 우리의 대다수 교수들은 상향 평가를 남발한다. 우리의 대다수 대학생들이 “진지한 노력”도 없이 어지간하면 80~90점대를 상회하는 높은 점수를 받는다. 거품이다. 그야말로 심각한 거품이다. 대학이 온통 평가의 거품에 휩싸여 있고, 그 거품의 포말이 젊은이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가 하면 사회 전체의 평가 의식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누구의 잘못인가. 누구의 책임인가. 예상되는 온갖 변명에도 불구하고 일차적으로 교수들의 잘못이다. 그릇된 제도와 시류에 휩쓸려 ‘학점 잘 주기’ 경쟁을 벌이고 있는 교수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평가와 관련한 교수들의 잘못과 책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교수 채용 심사에 있어서도 적잖은 교수들이 학문적 양심을 저버린 채 학연, 지연, 혈연, 그리고 돈에 휘둘리고 있다. 오죽하면(!) 갓 출범한 교수노조에서 작은 직책을 맡고 있는 나한테마저(!) 겨우 한 달 사이에(!) 교수 채용 심사 관련 비리가(!) 무려 10건이나 제보되겠는가! 내가 거주하고 있는 전주는 물론, 강릉에서, 평택에서, 공주에서, 대전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제보 내용을 들여다보면 우리 대학과 교수사회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이것은 도무지 대학이 대학이 아니고 교수가 교수가 아니다. 특정 지원자를 합격 또는 탈락시키기 위해 자행되는 일이 참으로 가관이다. 교수가 감히 1~2위 편차와 2~9위 편차가 맞먹는 편파적인 평가를 한다. 교수가 감히 평점표의 수치를 수정 잉크로 수도 없이 고쳐 놓는다. 교수가 감히 짤막한 학위논문 논평을 워드로 작성하고 심사표를 복사해 그것을 원본으로 제출한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총장과 대학당국은 ‘아무 하자가 없다’고 한다대개는 대학당국에 공범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와대에 민원을 제기하면 그것이 교육부로 이첩된다. 교육부는 그것을 총장에게 이첩한다. 도로아미타불이다.

요컨대 우리의 대학과 교수사회가 엄정한 평가의 전통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 진리와 정의와 양심에 입각해 주어진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다른 부문, 다른 계층의 공정한 평가를 선도해야 할 대학과 교수사회가 오히려 막무가내식 상향 평가와 각종 비리를 재생산해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대학과 교수사회가 바야흐로 자폐적인 부패 집단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심각한 현실에 직면해, 누가 어떻게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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