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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들을 싫어하는 까닭
내가 그들을 싫어하는 까닭
  • 권혁범 대전대
  • 승인 2003.03.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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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서민과 ‘엘리트’
대통령 취임식 방송을 보는데 사람들이 ‘노무현을 좋아하는 이유 다섯 가지’가 나온다. 진솔한 인간미, 정치적 리더십, 당당한 소신 등의 답변이 나왔다. 1위를 차지한 답변이 궁금하지 않은가. 내 예상을 뒤엎고 ‘서민적 이미지’가 정답이었다.

사실 빈농과 상고 출신이라는 ‘서민적’ 배경은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당시 후보가 ‘귀족 엘리트 이미지’를 가진 이회창후보를 꺾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대다수 한국인들은 귀족도 엘리트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은 엘리트를 부러워하고 추종한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그들에 대해 동질감을 느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서민’출신이면서도 한국사회의 정상, 즉 사법시험에 합격해 판사 변호사를 거쳐 국회의원 장관이 된 노무현씨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민’ 출신이면서도 ‘엘리트’의 정상에 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아직도 빈농이며 고졸 회사원에 불과한 ‘서민’이라도 사람들이 좋아했을까. 오히려 그는 ‘서민’도 노력하면 ‘엘리트’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증명한 존재라는 점이 중요하다. 선거 막판에 다급해진 이회창후보가 시장 골목 등을 돌며 ‘서민적 이미지’를 애써 만들어보려고 한 것은 그 만큼 그 이미지가 대중적 호소력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민적 이미지’의 실체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볼수록 도대체 ‘서민’이라는 게 무슨 뜻을 갖고 있는지 딱 잡아내기 힘들었다. 사전적 정의로만 보면 ‘庶民’은 “①아무 벼슬이 없는 일반 평민, 백성, 庶人, 혹은 ②사회적 특권이나 경제적인 부를 누리지 못하는 일반 사람”을 지칭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첫번째 뜻은 봉건사회에서 온 것이라는 점이다. 두번째 풀이는 좀더 오늘의 현실에 와 닿는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특권이나 경제적인 부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의 기준이 어디까지인지 불확실하다. 한마디로 서민은 매우 애매한 수사학적인 개념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왜 이런 단어가 한국정치에서 애용됐을까. 물론 용어의 정치문화사적 연구가 별도로 필요하다.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서민’이 널리 쓰이는 중요한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계급의식의 약화 혹은 부재와 관련이 있다. 가령 대다수 민주주의 사회의 정당들은 상당히 차별적인 계급정향을 갖는다. 노동자, 중간계층, 부르주아 등 산업사회의 주요 계급을 축으로 해서 정강 및 정책을 정한다. 반면 한국사회에서는 분단 및 오랜 독재체제의 억압으로 인해 정당은, 최장집 교수의 표현을 빌어, ‘이념적 협애성’에 갇히게 됐고 정치인들은 분명한 ‘계급적 지향’을 드러낼 수 없었거나 상실하게 됐다(물론 어떤 선진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정치인들은 계급적 정향을 애매하게 처리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가령 불과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노동자는 공적인 담론의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대표될 수 없는 존재였다. 그것은 좌파적 경향을 증거하는 기표로 터부시됐고 ‘노동자’를 내세우는 사람은 즉시 ‘친북 용공’의 혐의를 자동적으로 안게 됐다. 어떤 정치인이 자신의 출신 배경으로 ‘노동자’를 내세울 수 있겠는가. ‘빈농’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서민’은 계급적 정체성을 흐리면서도 동시에 특정 정치인이 ‘역경을 이겨낸 엘리트’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그것은 사회 상층의 경계심을 피해가면서도 동시에 하층 계급의 표를 동원해낼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언어로 떠올랐던 것이다. 즉 ‘서민’은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이분법적 좌우 이데올로기적 틀을 피해갈 수 있는 효과적인 수사이면서도 그 속에서 전혀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온갖 고난을 감수해온 ‘약자’, ‘희생자’의  정당한 이미지를 확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서민’은 사실 한국의 정당체제나 정치인들이 극복해야 할 탈계급적 정체성을 되려 유지 강화할 수 있는 위험한 개념이기도 하다.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인 편향을 갖는다. ‘국민’ 혹은 ‘민족’만큼 그것도 정치인들이나 정당이 안전하게 도피하고 의지할 수 있는 피신처가 된다. 그 흐리멍텅한 언어 속에서는 어떤 이념적 배반이나 모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한국사회는 다양한 계급들이 자신들의 정신적 물질적 이해관계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이념정당들이 그것들을 대표하며 경쟁하는 본격적인 정당정치의 시대로 진입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서민’보다는 ‘노동자’가 정치의 전면에 대표돼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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