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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위기와 나이 듦
대학의 위기와 나이 듦
  • 박순진 편집기획위원/대구대·경찰행정학과
  • 승인 2017.10.17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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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박순진 편집기획위원/대구대·경찰행정학과

볕이 좋은 가을날, 연구실 벽 거울에 비친 머리 희끗한 얼굴이 문득 낯설다. 막 대학 교단에 섰을 때 여러 선배 교수께서 필자더러 젊은 교수라 정답게 부르며 지혜를 베풀어 주시던 기억이 새롭다. 머리 희끗해진 지금도 마음은 여전히 젊은 교수인 듯 지내지만 교정을 오가다 막 부임한 진짜 젊은 교수를 만나면 퍼뜩 정신이 든다. 필자를 살갑게 대해주던 선배 교수들은 든든하고 크신 분들이셨다. 참으로 힘든 시절을 지나며 시대의 아픔을 마주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실천하던 참된 지식인들이 많았다. 이 가을, 거울에 비친 초로의 내 모습을 마주하면서 나는 과연 그 때의 선배 교수들처럼 크고 든든한 사람일까 자문해본다.

대학 사회는 만남과 헤어짐이 되풀이되는 곳이다. 정들면 어느새 떠나보내고 낯선 신입생을 다시 맞이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으나 젊은 세대를 가르쳐서 그들이 길을 찾아 떠나는 장면을 지켜볼 수 있으니 무척 보람차다.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기는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든든한 원로 교수를 떠나보내는 일은 아쉽고 힘들지만 전도유망한 젊은 교수를 만나는 일은 유쾌하고 기쁜 일이다. 젊은 교수에게 모범은 못되더라도 선배 교수로서 추한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지 하고 필자는 가끔 다짐하곤 한다. 하지만 대학이 구조조정이라는 광풍에 휩쓸리면서 교단에서 한해 두해 나이 듦이 예전처럼 녹록한 일은 아니게 됐다.

학령인구가 급감하는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 대학은 학사구조를 혁신하고자 힘껏 노력 중이다. 염려스러운 일은 실용위주의 학문이 강조되는 경향이 지나치다는 사실이다. 대학이 실용적 학문 위주로 재편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여러 면에서 의문이 있다. 지난 몇 년 사이 실용적 가치가 적고 신입생 모집이 어렵다는 이유로 특정 학문 분야가 대학에서 외면당하거나 오랜 역사를 가진 학과가 하루아침에 통폐합되는 일이 많았다. 학문과 교수의 가치가 근본부터 흔들리는 때에 선배 교수들처럼 대학과 학문의 역사적 의미와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고 소중한 가치를 지키는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지성의 요람인 대학의 역할은 제4차 산업혁명과 같은 현안 과제에 대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본성과 인류 사회에 대한 깊은 고민을 지속하는 것도 중요하다. 실용위주의 학사구조가 정부와 기업이 요구하는 눈앞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을지라도 우리가 장차 직면하게 될 미래 사회의 바람직한 구조를 제시하거나 미래 인류의 인간다운 삶의 길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대학은 당장 실용적인 쓰임이 분명하지 않더라도 시대가 요구하는 화두를 붙잡고 깊이 고민하는 여유를 가져야 마땅하다. 아쉽게도 원로 교수들이 하나둘 퇴임하면서 문·사·철을 논하던 대학의 분위기는 급속하게 퇴조하고 있다.

작금의 대학에서 인문교양은 겉으로는 강조되는 듯 보이지만 홀대받는 양상이 뚜렷하다. 비정년 트랙이라는 전혀 대학답지 않은 교수임용이 가장 빈번한 분야도 인문교양이고, 구조조정에서 인문교양은 언제나 최우선 대상이다. 대학조차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사변이 가치 없는 양 치부하고 있다. 요즈음은 교수의 삶이 예전 같지 않다. 신임 교수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예전보다 훨씬 치열하게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학과 구조가 개편되는 치열한 대학 사회에서 교수들은 자신의 학문을 지키고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 긴박한 일이 되고 말았다. 이들에게 실용이 깊은 사변을 압도하는 상황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대학이 대학답지 못하고 기형적으로 변해 가는 것에는 분명 학령인구가 감소한 탓도 있고 근시안적인 정부의 반강제적인 정책 탓도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작금의 어수선한 대학 분위기는 대학에 오래 재직하면서 나이 들어온 기성 교수들이 만들어낸 비겁한 정책과 비민주적인 제도의 결과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대학의 위기라는 구조적 조건 하에서 좀 더 깊이 성찰하지 못한 잘못은 없는지 진솔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마땅하다. 대학을 넘어 시대와 사회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해온 선배 교수에는 못 미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대학 안에서나마 든든하게 제 역할을 했는지 돌이켜 볼 일이다.

박순진  편집기획위원/대구대·경찰행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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