味覺의 본능에 구속된 인간 … 속이거나 죽이거나 때로는 전쟁까지도
味覺의 본능에 구속된 인간 … 속이거나 죽이거나 때로는 전쟁까지도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7.10.10 16: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욕망의 음식-음식의 문화사_ 8. 미식의 신천지(1): 새로운 맛에 눈 뜬 西歐

학 강의를 처음 시작한 1979년 음력 3월 초닷새 날이다. 지금은 없어진 ‘중앙청’(과거 조선총독부) 건물 옆, 삼청동 청와대로 올라가는 길가에 시중 사찰 法蓮寺가 있다. 정확하게는 ‘조계종 서울총림 법련사’다. 한 때는 요정이었던 그곳에서 매달 음력 초닷새 오후 2시 월례강좌가 열리곤 했다. 음력 3월이었으니 양력으로는 4월 첫 째 주 쯤 됐을 것이다. 그날은 돌아가신 법정스님의 강의가 있었다. 강의는 실내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나는 툇마루에 앉아 목소리만으로 그분의 말씀을 경청했다. 그날 그 자리에서 칼릴 지브란을 처음 알게 됐다. 스님은 지브란의 『예언자』 중 ‘베풂에 관하여’라는 부분을 놓고 불교 6바라밀의 으뜸인 단(dan, 布施)과 견주어 지브란의 생각을 전하고 계셨다. 38년 전의 일이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먹방’이라 해서 방송사들마다 음식 관련 프로그램을 경쟁적으로 제작 방영하고 있지만, 그래서 보릿고개니 꿀꿀이 죽이니 하는 말이 구시대의 언어처럼 들리고 실제로 그렇기도 하지만, 우리는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끼니 걱정을 하던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솔직히 日帝의 강점에서 해방되고 6·25 전쟁을 거쳐 참다운 민주공화국이 들어서기까지 우리나라는 가난했다. 세계 최빈국에 속해서 유엔의 원조를 받아야 했다.

쌀은 언감생심, 보리쌀도 아끼고 아껴야 했고, 식재료인 밀가루조차 귀했다. 바닷가 사람들에게 그나마 넉넉한 건 물고기뿐이었다. 식량이 될 수 있는 인근 산천의 초근목피도 한정이 있었다. 하루 세끼, 매일 매일을 물고기만 먹고 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었다. 물론 현실은 굶기를 밥 먹듯 해야 했다. 지긋지긋한 물고기 비린내가 싫었던 바닷가 사람들은 궁리했다. 꽁치를 삶아 뼈는 발라내고 살을 조심스레 뭉쳤다. 유사 수제비국을 끓이기 위함이다. 물을 끓이고는 거기 고추장을 풀었다. 그리고 수제비처럼 뭉쳐두었던 꽁치살을 조심스레 넣었다. 마침내 ‘나이롱(가짜라는 의미) 수제비국’은 비린내가 확 없어지고 먹을 만했다. 영동지방의 장칼국수는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요즘도 과거 빈한했던 시절의 음식이 막무가내로 그리운 사람들은 단골 칼국수집에 생선을 들고 가서는 장을 푼 국수에 통째로 넣고 끓여달라고 부탁을 하는 경우가 있다.

입맛은 묘한 것이다. 없이 살 때는 고개를 돌리던 비린내가 살만하니 그리운 냄새가 된다. 예로부터 가난한 자가 먹는 음식은 생존용이고 부자가 맛보는 음식은 별식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음식 부자가 됐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식을 위해 수저를 든다. 그리고 맛이 없으면 이내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음식이 음식다워야 한다며 저마다 미식가가 된다. 그런즉 맛없는 음식을 먹다가 우연히 혀를 녹일 정도의 맛있는 음식을 발견한다면, 또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면 어떨까? 사람들은 돈을 들여서라도, 수고를 더 하더라도 맛있게 먹으려 할 것이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하려한다.  

▲ 후추나무 잎새와 후추 알갱이들. 그림출처=https://ko.wikipedia.org

속고 속이고, 불순한 건배

그 전에 건배에 대해 약간의 언급이 필요하다. 왜 우리는 서로의 술잔을 채우고 건배를 할까? 우정의 이름으로, 연인 간에는 사랑을 위하여, 또는 회사의 발전을 기원하며 우리는 건배를 한다. 꼴 보기 싫은 상사의 건강과 행복을 웃는 얼굴로 비는 간교한 건배도 있다. 건배는 사실 형식적 요소다. 내용의 진정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례적으로 건배를 행한다. 왜 사람들은 이런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할까?

주객(host와 guest) 간에, 상사와 부하가,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들이 각자 혹은 상호 술을 따라 건배를 하는 것은 술에 독이 들지 않았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고대 실크로드 상의 카라반세라이(caranserai, 隊商宿所)는 사막과 초원, 그리고 산악을 넘나들며 교역을 하는 각국의 상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유럽에서는 hospital이 그런 곳이었고, 이것이 후일 호텔의 기원이 됐다. 여행자에게는 다만 숙식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심신의 피로를 덜고 아픔을 치유해 줄 요양 시설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파리의 H?tel-Dieu와 같은 지명 속의   h?tel은 중세 이후 병원이었던 곳이다. Hotel은 hostel에 해당하는 고대 불어 ostel이 후일 h?tel로 변모해 영어 어휘 속에 들어온 것이다.

숙소를 찾아든 상인들의 허리춤에는 전대가, 낙타나 말 등에는 귀한 물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호시탐탐 이걸 노리는 도둑들이 어디에나 있었다. 한 번 눈독을 들이면 불한당들은 대상의 목숨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 놓고 술을 마실 수가 없다. 술잔을 받아 든 사람은 불안하다. 이 잔이 이번 생의 마지막 술잔은 아닐까? 그렇다면 너도 마셔라. 이렇게 함께 술잔을 채우고 친절한 듯 교활한 미소를 띤 사내들은 속으로는 자신의 무사를 빌며, 겉으로는 상대의 건강과 같은 전혀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건넨 뒤 잔을 비운다. 이때까지 사내들은 죽음의 공포로 몸을 떤다. 얼굴은 웃고 있어도 마음은 사색이 돼 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라이벌을 없애거나 이혼하지 않고 배우자를 제거하기 위해 술에 독을 타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그런즉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은 영광을 말하면서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사정을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까닭에 주인은 술잔을 들고 악의나 살의가 없음을 전하는 건배사와 함께 먼저 술을 마셨다. 그래도 미심쩍은 손님들은 술을 마시는 척하거나 마셔도 홀짝홀짝 한 모금씩 마셔 안전을 도모했다.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징표로서 건배는 삶의 질이 개선되고, 다시 말해 남을 해하지 않고서도 먹고사는 일이 해결됨에 따라 새로운 양상을 맞이한다. 자기들끼리의 우정을 확인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증거로 건배가 활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비록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옆자리의 사람에게, 또는 파티장의 멋진 여성을 향해 멀리서 잔을 치켜들어 건배를 청하는 선의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웨딩 리셉션이나 크리스마스 축하 파티, 파트너를 동반하는 고교나 대학교의 댄스파티 프롬(prom)에서는 별의별 건배 제의가 샴페인 거품처럼 풍성하다.

일가친척 많은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시부모, 장인 장모의 건배 제의에 뒤이은 조부모, 당숙, 사돈의 팔촌까지 진심어린 덕담을 겻들인 건배 의식(?)이 끝날 즈음이면 하객은 물론 신랑신부는 눈을 떠도 뜬 게 아니고 말을 해도 하는 게 아닌 지경에 이른다. 맛이 가는 지경, 필름이 끊기는 혼절(blackout) 직전의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그런데 건배를 제안할 때 영어권에서는 물론 “Cheers!” 라고도 하지만 “Let’s toast”라는 말을 쓴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Toast’는 본래 ‘(불에) 굽다(burn)’는 말인데 라틴어 torrere에서 왔다. 활자화 된 최초의 toast는 14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일 쏘삐즈(Oyle Soppys)라는 요리 레시피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오일 쏘삐즈는 김빠진 맥주 1 갤론과 오일 1 파인트(pint)를 넣고 끓인 풍미 있는 양파 스튜다. 당시 사람들은 오일 쏘삐즈 같은 스튜나 수프에 화덕에서 구운 토스트를 담그거나 적셔 먹은 것으로 보인다. 

1400년대와 1500년대에는 음료에 풍미를 더하는 용도로 토스트를 사용한 후 버리거나 먹었다. 1600년대에도 토스트는 여전히 ‘음료에 집어넣는(put it into drinks) 것’으로 간주됐다. 셰익스피어는 1616년에 지은 『윈저의 즐거운 부인들(The Merry Wives of Windsor)』 에 나오는 팔스타프(Falstaff)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토스트에 대해 말한다: “가서 사케((또는 셰리주) 1 쿼트만 가져다주시게. 토스트를 넣어서.” 사케(Sacke)라는 술은 16~17세기 영국인들이 좋아한 수입 백포도주 색(Sack) 대신 마시던 카나리아 군도 산 백포도주를 말하는데, 맛이 떨어지고 빛깔도 아름답지 못했던 듯하다.

토스트로 와인의 맛을 더하는 풍습이 사라질 무렵 영국의 식사 모임에서는 테이블에 앉은 사람 모두가 누군가의 건강을 위해,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사람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마시는 관행이 생겼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한 건배로 이어진다. 이런 건배는 흔히 어떤 숙녀의 건강을 위해 올려졌는데, 기원의 대상이 된 숙녀는 ‘좌중의 토스트(the Common Toast of every Publick Table)’라 불렸다.

사람의 마음 따라 언어의 용도나 의미가 달라지는 법이다. 1700년대가 되면 어떤 사람이 성적 매력이 있다는 점을 알리는 일종의 제스처로서 ‘toast’가 사용됐다. 토스트와 향초가 술맛을 더해주듯, 어떤 아리따운 숙녀의 존재가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하기 때문에 그녀를 ‘좌중의 토스트’라 부르게 됐다. 온 마을 사람들, 대개 남자들이 함께 하고 싶은 매력 넘치는 여성은 ‘The Toast of the Town’이라고 불렀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toast가 ‘축배를 받는 사람, 평판이 자자한 미인’을 뜻하게 됏고, drink a toast to Mary는 ‘메리에게 축배를 들다’는 말이 되었다.

새로운 자극에 눈 뜬 미각-향신료에 매혹되다

종교적 금기와는 별도로 물고기는 식량 부족의 인류를 굶주림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했다. 물고기는 고마운 양식인데다 돈벌이까지 가능했다. 물고기로 배를 채운 사람들, 물고기 때문에 부유하게 된 나라는 행복했을까? 일시 그랬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란 것이 본디 그렇다. 욕망은 충족이란 걸 모른다. 잠시의 만족은 있을지언정 이내 물리고는 새로운 자극, 더 강력한 쾌락을 추구한다. 그래서 인간은 고생을 사서 한다. 욕망의 지배를 받는 미각. 어쩐지 처연한 느낌이다. 일찍이 맛 본 적이 없는 동방의 향신료를 처음 접한 서구인의 감격을 생각해보자.

서양 중세를 마감하고 근세의 시작을 알리는 ‘대항해시대’라는 멋진 명칭은 서구 중심의 결과론적 분석일 뿐 냉정하게 말해 결핍에서 비롯된 死卽生의 결과물일 뿐이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다”라는 결과 중심적 사고방식을 탈피해 시대 상황을 바라보면, 당시 유럽은 경제적 관점에서 자급자족의 한계 상황에 봉착해 있었고, 따라서 생존에 필요하거나 부족한 물자를 조달할 절대적 필요성에 직면에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지중해 무역은 베네치아, 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사라센은 항시 위협적이었다. 살기 위한 선택은 대서양을 건너거나 사라센의 위협을 피해 아프리카를 우회하는 멀고도 험한 노정이었다. 다행히 이런 출구 전략이 성공을 거두고 무역로 확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한 유럽은 유사 이래 최고의 번영을 누리게 된다. 이를 두고 서양은 자랑스레 ‘대항해시대’라며 자신들의 진취성을 뽐내는 자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고 처음은 어려운 법이다.

15세기 말 리스본 항구를 떠난 포르투갈 선박들이 그랬다. 죽음을 각오하고 가족들과 작별한 뒤의 항해길. 아프리카 서해안을 돌아 희망봉을 바라보며 아라비아해와 인도양을 가로질러 긴 항해 끝에 마침내 인도아대륙 서남해안의 항구도시에 당도한 서구의 이방인들은 낯선 땅의 기후와 풍토, 이국적 풍물과 암갈색 피부의 인도인들을 만나 당혹스러우면서도 기뻤을 것이다. 당시도 현재도 그곳 주민들 대다수는 드라비다족(Dravidians)이다. 오랜 항해로 피로에 지친 외래인들은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먹고 쉬고 싶었다.

인도인들은 음식을 손으로 먹었다. 역시 손으로 음식을 먹던 유럽인들은 안심을 했다. 사실 음식은 손으로 먹는 게 제일 맛있고 가장 쉽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아랍인, 아프리카인들도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 나름의 규율이 있어 식사에는 여전히 오른손을 쓴다. 인도인들이 쟁반에 노란쌀밥을 담아 오른손 엄지와 검지 중지를 이용해 죽 같은 황갈색 액체를 버무려 맛있게 식사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이방인들은 일찍이 맛본 적 없는 동방 음식의 정체가 궁금했다.

현지인은 독특한 향과 맛의 비결이 ‘마살라(masala)’에 있다고 했다. ‘향신료(spices)’를 일컫는 인도말이다. 기호에 따라 얼마든지 이색적인 배합이 가능한 향신료의 종합세트 마살라는 온갖 요리에 이용된다. 차에도 마살라 차이(Masala Tea)가 있어 여기에 딴두르(Tandoor, 화덕)에서 구운 담백하고 따끈 고소한 난(naan)이나 차빠띠(chapati), 또는 기름에 튀긴 로띠(roti), 아빰(appam) 등을 뜯어 적셔먹는 모습이 마냥 신기했던 유럽인들은 본국에 돌아가 이들의 차 풍습을 본 따 고상하고 우아한 차문화를 발전시켰다. 와인이나 에일(ale: lager beer보다 독하고 porter 보다는 약한 맥주)을 마시며 여기에 토스트를 적셔 먹는 영국인의 풍습은 차이하네(chaykhane, 찻집) 안팎에서 기름에 튀긴 과자를 오도독 씹어 먹으며 밀크 티 차이를 홀짝거리는 인도인들의 오랜 생활상과 오버랩 된다.  
 
바스코 다 가마(Basco da Gama)와 후추 전쟁

인도가 원산지인 후추는 전 세계적으로 매년 약 13만 톤가량 생산되는데, 향신료 전체 생산량의 1/4에 해당하는 양이라고 한다. 가히 ‘향신료의 왕’이라 불릴 만하다. 과거에는 실물화폐로 쓰일 정도로 인기 품목이라 ‘검은 금’이라 불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조까지만 하더라도 연회석상에서 주연상에 후추가 오르면 기녀들이 서로 쟁탈전을 벌일 정도였다고 한다.

▲ 바스코 다 가마,Fonseca, Antonio Manuel da 作(1838), National Maritime Museum.

후추는 한자로는 胡椒(호초, 산초나무 초)라고 쓰고 후추라고 읽는다. 중국인들의 한자음을 우리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중국인들은 또 후추를 黑川이라고도 부르며 향료와 조미료로 사용한다. 胡椒의 胡는 이 식품이 중국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부터의 수입품임을 말해준다. 원래 胡는 북방과 서방의 유목민족을 지칭했으나 후일에는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족을 가리키기도 하고 때로는 吐蕃(티베트)을 말하기도 했다. 오아시스에 성곽을 쌓고 정주하는 居國과 물과 목초를 따라 유목생활을 하는 行國으로 구별되는 西域諸國을 구성하는 다양한 種族도 胡에 해당됐다.

그런 외국에서 유입된 물산에는 ‘胡’를 붙여 국산품과 구별했다. 따라서 胡桃, 호밀, 호빵, 호병(=호떡), 호박 등은 내륙아시아가 원산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胡盧笙, 胡旋舞도 서역의 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는 서구에서 유입된 물건, 서구와 관련이 있는 물품이나 사람 앞에 洋을 붙여 이름을 짓는다. 양파, 양장, 양복, 양말, 양화점, 양주, 양산, 양담배, 양배추, 양잿물, 양아치, 양놈, 양공주 등이 그러하다.

중국산은 ‘唐’자를 붙여 지칭했다. 唐麵, 唐根, 唐三彩 등등. 지명 唐津에서의 唐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당근의 원산지는 아프가니스탄이 속한 히말라야, 힌두쿠시 산맥 일대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아프가니스탄 일대가 원산지로 원나라 때 들어온 이 식물을 호라복이라 부르고, 우리는 중국을 통해 들여왔기에 당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미나리과 당근속의 당근의 꽃말은 ‘죽음도 아깝지 않으리’ 라고 한다.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 또는 1469~1524년)로 하여금 여러 가지 역경을 딛고 인도를 발견하게 만든 것이 바로 후추라는 향신료다. 바스코는 투자자들을 설득해 인도 항해를 위한 자금을 끌어 모았다. 1497년 7월 8일 4척의 배에 선원 170명을 인솔하고 리스본을 떠난 지 10여 개월만인 1498년 5월 20일 그와 선원들은 남인도 말라바르 지방 깔리꾸뜨(영어 표기는 Calicut) 부근 해안에 상륙한다. 그리고 소정의 무역 거래를 마치고 세 달 이십 일 만인 8월 29일 귀로에 오른다.

▲ 인도 께랄라주에 속한 꼬지꼬데(예전의 Calicut. 위치표로 표시된 곳). 향신료의 도시, 조각품의도시, 진리의 도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출처: 구글지도

그러나 인도양 횡단 중에 마주친 몬순 탓에 선원의 절반이 목숨을 잃고 살아남은 선원들도 괴혈병에 시달렸다. 그 때문에 2척의 배가 바스코가 탄 ‘싸웅 가브리엘(S?o Gabriel)’호보다 먼저 본국에 돌아오고, 바스코는 9월에 험한 여정을 마치고 포르투갈에 닻을 내린다. 그런 중에 대부분의 화물은 소실됐다. 그럼에도 남은 물품이 투자자들이 출자한 액수의 3천배가 넘는 수익을 낳는다. 사정이 이와 같으니 연달아 무역선이 인도를 향해 출항하게 됐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바스코 다 가마도 2년 반 뒤인 1502년 20척의 군함을 이끌고 인도를 향해 출항한다. 목적은 첫 항해 때 깔리꾸뜨에 남겨두고 온 포르투갈인들이 살해당한 일에 대한 보복을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와 포르투갈 병사들은 캘리컷 토후가 이끄는 인도군과 전투를 벌인다. 마지막 3차 인도행은 1524년 인도 총독으로 임명받아 부임지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고아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 코친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유럽에서 인도까지 항해한 최초의 인물, 인도 항로를 최초로 개척한 이 항해자 덕분에 포르투갈은 해상제국이 될 수 있었다. 바스코가 인도와의 교역을 통해 상업적 이익을 낳도록 한 효자상품이 무엇이었을까? 바로 후추다. 그렇다면 후추가 무엇이길래 서구인들의 미각을 사로잡았을까? 왜 후추 알갱이 하나가 황금과 맞먹는 가치를 지니게 됐을까?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