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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속 여정 같은 신화 연구의 길
신화 속 여정 같은 신화 연구의 길
  • 최원오 광주교대·국어교육과
  • 승인 2017.09.12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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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최원오 광주교대·국어교육과

나는 인문학을 연구한다. 그 중에서도 한국문학, 한국문학 중에서도 고전문학, 고전문학 중에서도 구비문학, 구비문학 중에서도 신화를 연구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인문학자이고, 엄정하게 말하면 신화학자다. 그런데 한국신화만을 연구하는 게 아니고, 동아시아를 비롯해 세계 여러 민족의 신화를 모두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으니, 더 엄정하게는 비교신화학자라고 말하는 게 옳겠다.

내가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데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학자가 특정 전공의 이름으로, 또는 특정 전공의 전문 연구자로 불리는 방법은 대강 두 가지다. 하나는 공식적인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비공식적 방법이다. 공식적인 방법은 자신이 전공한 박사학위의 분야와 연구주제를 통해서고, 비공식적 방법은 박사학위를 받은 후 타 분야의 지속적 연구를 통해서다. 나는 전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비공식적 방법을 통해 이름을 얻은 학자도 아닌데, 왜 가슴 아프냐고? 사연인즉 이렇다.

한국문학계에서 구비문학은 뒤늦게 시작된 학문이기도 하려니와, 말로써 전승된 문학을 연구하다보니, 문자로 기록된 문학을 연구하는 것에 비해 다소 수준 낮은 것으로써 취급되는 오해를 받았다(때로는 그것 때문에 그걸 연구하는 학자까지 수준 낮게 평가되기도 한다). 하긴 ‘문학’이 문자로 기록된 것을 지칭하는 것에서 비롯됐으니, 오해를 받을 만하다. 기록문학자들의 눈에, 문학도 아닌 것을 문학이라고 지칭하며 연구하고 있으니, 그 학문적 정체성을 의심받을 만하다. 그러니 구비문학을 전공한 것만으로 교수 공채에 명함을 내미는 것은, 소위 바위에 계란을 치는 격이다. 따라서 구비문학 공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면, 박사학위 논문의 연구주제를 기록문학까지를 포괄해 설정하는 게 지극히‘현명한’방법이다. 나도 물론 ‘현명한’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도중에 어그러졌고, 최종적으론 ‘동아시아의 영웅서사시(영웅신화)’를 비교연구하는 것으로써 문학박사학위 논문을 받았다.

영웅신화는‘영웅의 일대기’로 짜여 있다. 신성 혈통을 이어받았으나 어려서 버림 받고, 누군가에 의해 구조됐으나 다시 버림받거나 죽을 위기에 봉착하고, 그러다가 자신의 능력으로써 소속 집단이 원하는 과업을 성취해, 마침내는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게 된다는 게 그 골자다.

학문의 여정이란 게 그렇다. 어떤 것을 오랜 기간 동안 골똘히 연구하다 보면, 본인이 그 연구의 주인공이 돼 있음을 불현듯 자각한다. 나의 경우, 지난한 학문의 여정에 한정하면 말이다.

그래서 박사학위 취득 이후 나는 오랜 기간 동안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그 주변만을 맴돌았다. 해외박사후연수지원비를 받아 미국에서 2년 동안 학문 유랑까지도 경험했다. 그렇지만 지난한 학문의 여정에서 볼 때, 내가 작성했던 박사학위 논문은 나름대로‘동아시아의 서사학’을 정립했다는 학계의 평가를 받았고, 저서(동아시아비교서사시학)로 발간됐을 때에는 제1회 대한민국학술원 우수도서로 선정됐으니, 아픔은 어느 정도 보상받은 셈이다. 또한 미국 인디애나대 민족음악학 및 민속학부에 머물면서 남북미 신화에 눈을 뜨게 됐고, 그것을 통해‘나의 학문의 여정’을 재설계하게 됐으니, 아픔에는 꼭 상처만 남는 건 아닌 듯하다.

본래 나는 동아시아에서 시작해, 동남아, 태평양, 남북미의 신화를 비교하는 것으로 연구 범위를 넓혀가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2년간 체류 경험은 그 순서를 정반대로 바꿔버렸다. 이유가 뭐냐고? 내가 보기에 남북미 신화는 세계 여러 민족의 신화를 이해하는 데 긴요한 단서들을 암축하고 있다. 일찍이 제임스 프레이저는 남북미 신화 자료를 토대로 그만의 이론을 구축하였는데, 그 이론은 세계 여러 민족의 신화를 분석하는 데 소용되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그의 이론을 검증할 겸해 근래 10년을 기약하고 남북미 신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얻은 학문적 이름, 즉 비교신화학자로서의 길을 계속해서 가고 있다. 약간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타 분야가 유혹하더라도, 내가 애초에 설정하였던 길을 가는 게 학자의 사명이기에.

최원오 광주교대·국어교육과

서울대 국문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구비문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아이누의 구비서사시』, 『 동아시아비교서사시학』, 『한국고전산문의 탐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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