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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의 감각이 그립다
결핍의 감각이 그립다
  • 김주연 숙명여대 명예교수·독문학
  • 승인 2017.09.1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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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김주연 숙명여대 명예교수·독문학

그리움이라는 낱말도 감정도 슬그머니 사라진 것을 보면 과잉은 과잉인 세상 같다. 주위를 둘러보면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아, 있기는 있다. 최근 가요계 일각에서 약간의 복고 바람 비슷한 것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CD나 카세트 대신 그 육중한 LP 판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 지극히 일부의 호기심일 터이지만 어쨌든 반갑다. 그리움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그처럼 고마울 수가 없다. 그리움이란 부재의 현실, 결핍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의 반영이다.

거기 없기 때문에 그것을 그리워하지 않겠는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다. 가령,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은 가장 전형적인 그 감정이다. 헐려나간 고가(古家), 소멸돼버린 가치, 때로는 비판의 대상이 된 제도조차도 오직 지금은 부재중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별의 쓴 잔을 마셨다 해도 첫 사랑은 언제나 그립지 아니한가.

그러나 이제 그리움은 보이지 않는다. 헤어진 연인의 자리에 더 근사한 사람이 들어서고, 다시 그 뒤로 새..., 새..., 새..., 들이 줄을 잇는다. 헐려나간 고가의 자리엔 수십 층짜리 빌딩이 들어서고, 아날로그 시대의 다정했던 정경은 기능과 속도를 자랑하는 디지털의 반짝이는 모습 속에서 자취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그럴만해서 새 것으로 대체됐지만 사라진 것들에 대한 조금만큼의 그리움도 보이지 않는 것이 섭섭하다. 왜 그렇게 우리는 있는 것들을 부수고 밀어내는 일에 바쁜가. 대통령선거를 비롯한 각종 선거에서 거의 모든 후보자들은 여야 가릴 것 없이 입을 모아 변화와 개혁을 내세운다. 변화가 가장 매력적인 구호인 모양이다. 도대체 가만히 있을 줄 모른다. 지킬 것은 지키겠다고 말하는 이는 드물다. 눈에 보이는 것이든 아니든 때려 부수고 다시 세워야 직성이 풀린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런 풍경은 없다. 방한한 어느 프랑스 건축가 앞에서 누군가 빠른 속도의 건축과 토목기술을 자랑했더니 되돌아온 프랑스인의 반응은 “한국인들은 부수는 것도 빠르더군요”였다. 이러한 평가는 비단 건축물에만 해당되는 언급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 없는 것을 아쉬워하고 사라진 것을 그리워할 줄 아는 마음. 그것이 인문학이다. ‘배낭 속 인문학’ ‘거리의 인문학‘ 하면서 인문학이 대학을 나와서 구호화되면서 부질없이 실체를 찾아 헤매고 있다. 대학에서 슬그머니 쫓겨나더니 TV와 길거리로 옮겨 앉은 모양새다. 그러나 인문학은 여행이나 역사물처럼 반드시 가시적인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은 마음, 더 정확히는 그리움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우리 가운데 사라진 것을 반추하고 그리워하는 결핍감이다. 부재의식이다.

“이 궁색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위해 사느냐?”고 『빵과 포도주』에서 부르짖었던 독일 시인 F.횔덜린. 그는 고대 그리스의 찬란했던 문화와 공동체가 소멸됐다고 생각한 18세기 독일사회를 거대한 결핍으로 바라보았다. 동시대의 괴테 또한 모든 것이 구비됐다고 믿은 고대 그리스의 질서를 그리워하면서 대작 『파우스트』를 완성했다. 사실 그들이 살았던 18세기 독일이 꼭 결핍된 불우한 사회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괴테도 횔덜린도, 그리고 베토벤도 동시대를 결핍의 시대로 인식하고 저 유명한 질풍노도운동을 벌였다. 물론 이 운동은 어떤 결집된 조직은 아니었으나 작가와 예술가, 철학자들이 각자 침통한 부재의식을 바탕으로 인문학의 소망스러운 지평을 그리움을 통해 구현했다. 만약 그들에게 그리움과 결핍감, 부재의식이 없었다면 괴테도 횔덜린도 베토벤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러나 우리에게는 결핍 대신 과잉만이 넘치는 것 같다. 물질의 과잉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불의도 과잉이고 정의도 과잉이다. 조용히 무엇인가를 그리워할 줄 아는 결핍의 감각이 그립다.

 

 

 

 

 

 

김주연  숙명여대 명예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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