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6:35 (금)
인생은 운명이다!
인생은 운명이다!
  • 나선길 동아대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16.07.25 13: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원로칼럼] 나선길 동아대 명예교수·정치학

1930년 생 87살, 필자는 한국 근현대사를 완전히 살아낸 사람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 우리 마을에는 윤 생원 댁 두 딸 외에는 학교에 다니는 여자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열 살 정도의 동네 아이들은 야학 선생 댁, 호롱 불 밑에 삥 둘러앉아서 언문(한글)과 자기 이름을 한 자로 배우고 있었다. 필자의 바로 위 남아는 애기 때 죽고, 네 살 위의 언니가 그 야학에 다니고 있었다. 대여섯 살쯤 이었을까? 내가 그 비좁은 틈바구니에 들어앉을 곳은 없었다.
 

"밤에는 선생님, 낮에는 여성단체 지도자로서,
 여성과 사회, 정치발전을 위해 열정을 쏟았다.

언니가 쫓으면 또 뒤따라가고, 그렇게 언니 등 뒤에 딱 붙어서 함께 배웠다. 나중엔 선생님이 매를 주시면서 “네가 선생을 해라”하시는 야학의 귀염 동이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열한 살에 학교에 입학했다. 일제치하, 5학년 때는 학교에서 벼 베기를 하다가 낫으로 발등을 찍어 오르내리막 근 10리 산길을 어머니에 업혀 등교한 때도 있었다. 6학년 때,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분명 나는 정신대에 갔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교육은 그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1945년 8월 15일, 이른바 '대동아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해방 되었다. 필자가 6학년 때이다. 일본 교장을 비롯해서 조선 인 교감도 언제부터인지 자취를 감추었다. 한동안 중단됐던 학교가 다시 시작되고, 우리는 '가갸거겨'에서부터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3월 신학기가 다음 해는 9월로 바뀌었다.

1946년 9월, 해방 후 전주사범학교 1회 입학생이 되었다. 학교는 늘 학생 데모로 어수선했다. 2학년 때 단체관람으로 영화 「퀴리부인」을 보고, '제2세 퀴리부인'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은 그 꿈을 일순에 무너뜨렸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사회, 정치에 눈을 뜨게 된 시기다. 6·25는 교육 받은 여성에게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굴곡의 시절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신이 계셨다.

1951년 21살, 6·25로 한 쪽 구석이 폭격을 맞고 폐교가 돤 부용중학교에 무상교육의 학교 설립을 구상했다. 결론은 그 곳이 아닌 기존의 ‘백구고등공민학교 부설 공민학교’로 인가가 났다. 그 부설 공민학교가 아니고, 당초의 뜻대로 되었다면 필자의 오늘은 결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교무실을 쓰고 있던 대학 출신의 고등공민학교 선생님들은 필자에게 진학을 적극 권유했다. 그 고마운 조언과 협조로 다시 진학의 길에 들어섰다. 그 과정은 또한 오늘 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 연배라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가끔 필자는 인생은 운명이라는 생각을 한다. 1955년에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했다. 가정과 정치를 양립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정치 실천이 아닌 정치 교육으로 뜻을 굳혔다. 1961년 정치학 석사가 됐다. 각 학과마다 한두 명에 불과했던 동기 남학생들은 다 대학 강단에 섰다. 그 후 필자는 중학교 교사로 12년간 근무했다. 박사과정 4년차 때 국민윤리학과가 개설되고 비로소 대학 강단에 설 수가 있었다.

야간 중학교 교사 시절, 필자는 여성단체, 사)여성문제 연구회(회장 이희호)부산지회를 창립했다. 이 후로 밤에는 선생님, 낮에는 여성단체 지도자로서, 여성과 사회, 정치 발전을 위해 열정을 쏟았다. 여성의 정치 참여, 여성 국회의원 공천을 위한 대통령과 각 정당에 건의문, 신문, 공문서의 한글 전용화 운동, ‘저녁 식탁의 아빠 찾기 운동’ 등을 위해 노력했다.

그 후로 모든 공문서, 신문은 다 한글로 바뀌었다. 1995년 9월 정년퇴임하고 이후 5년간은 대학원에서 하나의 강좌를 맡았고, 2001년 71살에 교단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이후 거주 지역 해운대에서 무료 여성 교양강좌를 개설하기도 했으나 별 호응은 없었다. 오늘에는 다만 신문 속에서 세상을 고뇌하며 이 땅의 평화와 겨레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뿐이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서,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열심히 살았노라고 자부한다. 동시에 진심으로 어떤 명리나 공명심은 추호도 없었다는 것도 스스로 인정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신 앞에 단독자로 섰을 때 “저 열심히 착하게 살고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생각이다.

 

나선길 동아대 명예교수·정치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