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20:55 (토)
익명의 심사에는 학자의 양심이 없는가?
익명의 심사에는 학자의 양심이 없는가?
  •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국어학
  • 승인 2015.12.21 15: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원로칼럼]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국어학
▲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

대학에서 교수들이 해야 하는 일은 그저 후학을 교육하는 일만이 아니다. 학문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더 중요한 사명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교수들은 어떨까? 오늘 아침 조간신문을 보니 백여 명의 교수들이 다른 사람의 연구서에 자기 이름을 붙여 업적으로 제출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필자는 우리나라 대학이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며 가슴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필자가 속한 국어학의 어떤 학회에서 새로 선출된 회장의 취임 일성이 이미 여러 번 논문을 학회지에 게재한 분들은 투고를 사양하라는 말이었다. 우수논문을 가려서 학문을 발전시키는 것보다는 동업자들의 취업과 승진에 필요한 요건 채워주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마 그에게는 학문이란 사치인 것 같고 이런 회장 아래서 학회가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필자는 지난 7월에 『한글의 발명』을 출간해 국어학자들의 빈축을 샀다. 이 책의 출판이 <동아일보>에 소개됐을 때 많은 악성댓글이 인터넷기사에 붙었다. 그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몸조심하라고 했으며 어떤 제자는 밤길을 절대로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전혀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책을 전혀 읽지도 않았고, 읽었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은 SNS 상에서는 대단한 호평을 얻었다.

『한글의 발명』의 간행 때문에 생겨난 동티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내가 참여한 한국학세계화 프로젝트의 지난 해 평가가 지난 9월에 있었는데 연구비 6천만 원을 삭감을 해야 하는 C등급으로 판정이 됐다. 프로젝트 결과물에 대한 심사서를 보면 계획대로 모든 연구가 진행됐고 결과물도 요건을 전부 충족했으며 충분히 최종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하 등급으로 판정한 것은 우리가 구축한 DB와 전산화 작업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번 연차 심사의 대상도 아니고 프로젝트가 끝난 다음에 제출하는 것이어서 이번 심사에는 자료도 제출하지 않은 상태였다.

심사원들이 이렇게 판정을 하니까 프로젝트의 발주처에서도 걱정이 돼 우리를 불러 DB 구축과 역학서의 전산화 작업을 가져와 보이라고 했다. 그동안 제출하지 않은 많은 자료를 컴퓨터에 담아가서 그 자리에서 시연했더니 그쪽 전문가가 90% 이상 완성이 됐고 이제라도 이 기관의 홈페이지에서 활용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앞으로 2년이나 남았으니 충분히 좋은 전산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다만 재단에서는 이미 두 번의 심사를 거쳐 받은 판정이니 번복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의 담당자들은 심사원들과 면담이라도 해서 이런 사정을 설명했더라면 이런 결과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DB구축은 구실이고 『한글의 발명』을 간행한 것에 대한 벌을 주자는 것이다. 온전한 연구자라면 내 주장을 반박하는 논저를 발표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러면 그에 대한 내 반론이 있을 것이고 여러 번 이를 반복하는 동안에 시비가 가려지고 진실이 들러날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논전을 통해 학문은 발전하는 것인데 그들은 익명의 심사에 숨어서 이런 편법을 쓴 것이다.

이와 같은 꼼수는 연구자로서는 물론이고 시정잡배들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더구나 그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일본인 교수이고 일본인들과 한국의 다른 연구자들도 그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어서 『한글의 발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이비 학자들이 지금 학계의 학회장이나 편집위원, 학회의 실무 임원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참신한 연구를 싹부터 자르고 있으니 우리 국어학계의 앞날이 참으로 정말 걱정된다. 필자의 논문은 투고만 하면 ‘게재불가’ 판정을 받는다. 익명의 심사에는 학자의 양심이라는 것이 없는가?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국어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