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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입가경 ‘빨리빨리’ 문화
점입가경 ‘빨리빨리’ 문화
  • 임소정 포스텍 석박사통합과정·생명과학과
  • 승인 2015.10.2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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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임소정 포스텍 석박사통합과정·생명과학과

가수 윤상의 ‘한 걸음 더’를 참 즐겨듣는다. 1990년에 발표한 곡인데 그 가사가 지금 듣기에도 어색함이 없다. 나는 아주 느리다. 무엇이든 새로이 익히는 것이 더디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 하기에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든다. 나는 이것을 큰 약점이라 여기며 살아왔는데 최근에 이런 내 성격이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님을 깨닫게 됐다. 내가 느린 까닭은 각 과정에 집요하리만치 집중하기 때문인데 덕분에 느린 만큼 더 견고한 성을 짓게 된다.

타고난 성정이 느림보인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빨리빨리’가 무섭다. 하루라도 ‘더 빠르다’고 뽐내는 광고를 보지 않는 날이 없다. 우리나라의 인터넷 속도는 세계 최고이고 세계 평균치보다 무려 5.6배가 빠른데도 좋아하는 영화를 보기 위한 채 몇 분의 기다림에도 짜증을 낸다. 그렇게 내려받은 영화를 또 스크롤을 건너 뛰며 본다. 인터넷 화면의 로딩이 조금만 늦어져도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눌러대고, 스마트폰의 화면을 탁탁 두드려댄다. 고작 몇 초인데 보고 있노라면 그 사이에 숨들이 넘어갈 것만 같다.

‘빨리빨리’로 인해 벌어지는 촌극들은 볼수록 점입가경이다. 다이어트를 빨리 하겠다며 무작정 굶거나 정체 불명의 다이어트 식품을 먹고는 부작용으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는 기사가 쏟아진다. 경쟁하듯 선행학습을 시키고, 더 많은 진도를 나간 것이 부모와 자녀의 자랑거리다. 과잉조기교육으로 인한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는 보고와 서적이 많건만 뚜렷한 교육관이 없는 부모는 시류에 편승했음에 안도한다. 12년의 교육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스스로 사유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 철학이 없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가슴 아픈 일이다.

‘빨리 달라’는 사람들로 인해 업체들은 속도를 경쟁한다. ‘신속배달’을 위해 곡예운전을 하는 배달원들은 달리는 시한폭탄이 되었다. 배달 오토바이 사고로 인한 산재 신청이 하루 평균 4명 꼴이라는데, 미신고건과 피해를 입은 다른 차량과 보행자를 감안하면 여간 높은 수치가 아니다. 온라인 시장도 ‘당일배송’이 대세다. 주문 후 나흘 정도를 기다리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분노에 차 업체에 항의한다. 밀려드는 택배 물량은 택배기사들을 지옥 같은 격무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불과 며칠 전, 전국 집배원노동자들이 모여 ‘장시간 중노동을 철폐해달라’며 결의대회를 열었다. 꼭 필요하다기보다는 물건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못해 뿔이 난 것이다. 택배는 파일을 내려받는 것과는 달라서 내가 재촉을 하면 누군가는 더 바삐 움직여야만 한다.

‘빨리빨리’는 안전불감증을 낳는다. 지척에 횡단보도가 있어도 무단횡단을 하다 사고가 난다. 주위라도 잘 살피면 좋으련만 빨리 건너려 그저 앞만 보고 달리다가 오는 차를 보지 못하고 사고를 당한다. 신호를 받고 앞차가 바로 움직이지 않으면 몇 초 사이에 경적을 울려댄다. 추월하려는 차에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 결국 멱살을 잡는다. 대중교통은 난폭운전을 하고 영화 ‘스피드’를 연상시키는 내달리는 버스 안에서 빨리 내리겠다고 휘청대며 이동한다.

대한민국을 갉아먹는 ‘빨리빨리’가 우리 과학계에 더욱 독으로 작용하고 있다. 오랜 기간의 투자와 인내가 필요한 기초과학연구를 등한시 하고 당장의 유행하는 과제만을 좇아 단기간에 성과를 평가 받는 풍토가 자리잡은 것이 작금의 서글픈 현실이다. 막스플랑크 연구회의 스트라트만 이사장은 최근의 인터뷰에서 이 ‘빨리빨리 앞으로 가려고만 하는 것’이 한국의 기초과학연구원이 지양해야 할 부분이라 지적했다. 과학자들에게 자유로이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고 진득이 기다려주는 것이 장기적으로 국가 과학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빨리빨리’는 실상 그리 빠르지 않다. 기다리며 참는 것은 손해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원치 않게 일터에서 쫓기듯 살고 있지 않은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내 일상의 속도만큼은 조금 늦춰보자. 시간을 나의 편으로 만드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다. 시간에 쫓겨 진정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도록 내 시간은 내 의지로 움직이자.

임소정 포스텍 석박사통합과정·생명과학과
식물세포생물학을 전공하고 있다. 애기장대에서 종자의 발아 조절과 꽃가루 형성에 중요한 ABC수송체를 연구한다. 한국연구재단 글로벌연구실사업 연구과제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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