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21:00 (토)
정치는 대화와 타협이라면서…
정치는 대화와 타협이라면서…
  • 설한 편집기획위원 / 경남대·정치철학
  • 승인 2015.09.23 11: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딸깍발이] 설한 편집기획위원 / 경남대·정치철학
▲ 설 한 편집기획위원

추석을 앞두고 경기불황, 취업난으로 국민은 우울한 가운데 주요 제조업 파업 위기에 노사 갈등 격화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국감장 곳곳에서는 주요 현안을 둘러싼 파행이 빚어지고 있으며,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 내부에서는 파열음이 잇따르고 있다. 우리 사회 전 부문에서 대화·타협·관용의 정치는 실종된 채 반목과 대립의 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기제로서 정치는 대화와 타협이라는데 우리의 정치?사회는 물리적·제도적·언어적 폭력으로 얼룩져 왔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타협과 합의의 정치는 한국 사회에서 왜 이리 어렵기만한가?

우리 사회 비타협의 정치문화는 분단과 전쟁, 권위주의 독재로 이어지면서 이념대립과 색깔론으로 점철된 역사적 폐해에 그 직접적인 뿌리가 있다. 이념대립은 합리적 의사소통과 자율적 토론의 공론장을 왜곡시켜 왔으며, 이념논쟁은 생산적인 정책논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당파적 이익을 위해 작동함으로써 극한의 적대적 대결만을 양산해 왔다. 허약한 타협의 토대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일제 식민지와 산업화과정, 그리고 정치적 부침을 거치면서 우리 국민의 가치관은 ‘생존우선주의’로 왜곡됐다. ‘물질이 곧 생존’이라는 잘못된 인식체계는 개인의 생존을 타인과의 경쟁 속에서 찾는 오도된 자유주의 가치관과 결합됐다. 그 결과 공동체의식보다는 개인주의, 공동선의 존중보다는 이기주의, 타인과 공존적 삶보다는 자신의 삶이 더 중요시되는 집단이기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말로는 조화와 상생을 외치면서도 구체적인 삶 속에서는 자신의 생존과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오늘날 한국 사회는 서구적 가치와 전통적 가치가 공존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특징으로 한다. 외래 사조를 포용해 그것을 전통적인 사유에 용해시켜 고유의 독창적인 문화를 창출했던 선조들의 지혜는 언제부턴가 사라졌다. 서구적 가치와 전통적 가치의 물리적 혼재는 개개인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 정신구조의 특징이기도 하다.
 
문제는 사람들이 상황과 필요에 따라 이들 가치를 선별적으로 이용해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낳고 우리를 기회주의자로 만든다. 결국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우리 사회 내부의 논쟁과 토론을 어렵게 만들뿐 아니라 논리적 일관성과 타협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사실 갈등이란 어느 사회에서나 개인·계급·집단 간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현대 다원주의 사회가 당면한 핵심과제의 하나는 구성원들의 상충되는 신념과 가치, 이해관계를 조정해 어떻게 다양성 속의 통합을 이루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 하지 않는가. 정치란 사회문제를 냉정하게 파악해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 가능성을 현실로 바꿔가는 예술행위라는 것이다. 현실을 변화시켜 나가는 민주적 정치과정은 대화, 협상, 타협이라는 수단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정치는 양보의 예술이기도 하다. 승자가 독식하는 제로섬 사회, 양보하면 패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정치문화에서는 타협의 정치는 불가능하다.

물론 모든 타협이 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1980년대의 민주화 투쟁은 오히려 비타협적인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결국 정치적 승리를 거뒀다. 타협은 진정으로 국민과 역사의 편에 서야 한다.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 사이에 타협은 성립할 수 없다. 가치와 노선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비전과 전략을 갖춘 원칙 있는 타협이어야 한다. 대화와 타협이라는 구호의 그럴듯한 외적 修辭에 빠져 가치판단이 유보된 채 이루어지는 타협은 야합에 지나지 않으며 남는 것은 정치꾼들의 권력투쟁일 뿐이다.

한국은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하고 착근시켰지만 국가운영의 효율적 거버넌스는 구축하지 못했다. 소통과 협치(協治)는 없고 대립과 갈등이 일상화되다 보니 고비용 저효율의 왜곡된 정치 구조는 고질적인 문제점이 됐다.

지금 정부와 여당은 4대 부문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시급한 게 바로 정치개혁이다. 흥정과 야합의 버릇이 굳어지기 전에 승자독식의 제도와 질서를 혁파해 타협과 합의의 정치문화가 작동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사회의 틀을 짜야 할 시점이다.

설한 편집기획위원 / 경남대·정치철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