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오로지 서생 노릇에 안주해 몰두하던 차모, 그가 은퇴한 지는 아직도 고작 보름 전쯤의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재직하던 대학에서는 총장, 이사장을 비롯한 많은 유력자들이 성대하게 공식적으로 전별을 해주셨고, 역대 지도학생들로부터도 ─특히 국내외에서 교수로 활동 중인 이들이 중심이 돼─ 기념 심포지엄이라는 잔칫상까지 자못 요란하게 차려 받다보니, 은퇴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지사로 확연히 각인되고 말았다.
은퇴는 ─‘철밥통’ 출신인 주제에 무슨 배부른 항변이냐고 할는지 몰라도, 톡 까놓고 얘기하자면─ 노령에 기초한 사회적, 경제적 공민권의 제약을 골자로 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노동정책적인 고려만이 우선시된, 매우 획일적이며 노골적인 노인에 대한 인권유린적 폐습으로서 대표적인 헌법소원감이 아닐 수 없다는 걸 정작 겪어보니까 알겠다.
그러나 우리 서생들, 애당초 돈이나 명예·권력 따위를 좇아 이 길에 접어든 게 아니다. 무장해제 당한 상태에서조차 우리는 전혀 켕길 것이 없다. 사회가 알아주건 말건 지적 추구는 이 세상 마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고, 자아확장 내지 인적 자본은 묘하게도 간단없이 축적으로만 진행될 뿐이므로. 키케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신체적 원기가 쇠퇴한대도 문과 선생들은 결코 불행해하지 않는다”고.
소속 대학의 높은 양반들은 은퇴식 자리에서 ─이런 경우 거의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듯이─ 재직기간 내내 뒷바라지한 ‘사모님’들의 헌신을 기리는 요지의 말씀을 특히 강조했다. 그 지적은 같이 나가는 여남은 명 가운데 여교원이 섞여 있지 않아서 매우 적실한 듯이 비치면서도 남성우월주의적 가정이 위태롭게 내포된 논법인데, 일종의 인수인계의 분위기를 확실하게도 효과적으로 연출했으니, 조직에서 쫓겨나는 노병들에게 이제 새로운 명실공한 소속장은 각 가정의 ‘사모님’들이 분명했다.
어찌 보면 우리 집사람은 통상적 은퇴사 속에서 추켜세워지는 전업주부적 ‘사모님’의 범주와는 거리가 있다. 평생 서생의 길을 같이 걸어온 집사람과는 대학 신입생 때 숙명처럼 만나서 군대 마치고 졸업하기 직전 결혼했었다. 당시 나의 이성관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고교생 때 읽은 『임어당수필집』에 수록된 「독서하는 예술」이라는 글이었다. 그 속에서 저자 린유탕이 송대 여류시인 이청조와 그 남편 조명성 부부의 독서법을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추켜세웠던 것이 무척 인상적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넉넉지 않은 살림 가운데에서도 의복을 전당 잡힌 돈으로 금석문 자료와 과일을 구해와 판독 내기를 해 이기는 쪽이 차를 먼저 마시곤 했다는 것이다. 장차 배우자를 얻는다면 반드시 이청조 같은 여자를 만나야겠다는 사춘기에 품은 막연한 희원은 그 이후 ─내가 못나서 그렇지─ 적어도 내 뇌리에서는 언제나 지남침 같은 역할을 해왔었다.
이런 의미에서 차모는 은퇴 이전에도, 따라서 은퇴와 무관하게 평생토록 그의 이 청조 ‘사모님’에게 귀의해 있었던 셈이다. 새삼 이 자리를 빌려 마누라와의 가연에 크게 감사한다. 전·현직 교수 벗님네들이시여, 이 짧은 글이 검증 안 된 자부나 사사로운 내용으로 점철되고 만 점에 대해서는 그저 갓 은퇴한 자의 헝클어진 머리통 탓이려니 하고 하해 같은 아량으로 용서하소서.
차종천 성균관대 명예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