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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에 ‘독립’이 달린 것은 아니다
30분에 ‘독립’이 달린 것은 아니다
  • 박성래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 승인 2015.08.24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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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박성래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 박성래 한국외대 명예교수

지난 15일부터 평양 시계는 서울보다 30분 느리다. 북한이 그 동안 기준 삼았던 동경 135도 대신 동경 127.5도 기준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이미 1997년 김일성의 탄생년(1912)에 맞춰 ‘주체’란 기원을 쓰기 시작했고 이번에 시간제도 바꿨으니, 앞으로 달력만 새로 개발해 간다면, 북한은 세계유일의 완전한 ‘시간 독립국’이 될 판이다. 축하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걱정도 없지 않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런 논평을 보자.

“광복 70년이 됐지만 우리는 친일파가 득세해 아직까지 동경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북한은 오래전에 친일파를 청산하고 이번에 기준시마저 바꾸게 된 것이다.”

꼭 그런 것이 아니다. 1954년 역시 일제 잔재의 청산을 명분으로 한국이 동경 127.5도 기준으로 30분을 앞당겼던 일이 있다. 또 37명의 국회의원이 발의한 ‘표준시 변경법안’은 4차례(2000·2005·2008·2013년) 한국 국회에 제출돼 지금도 계류 중이다. 북한의 ‘평양시’채택은 한국 국회의 법안을 채트려 간 꼴이라 할만도 하다.

우리 시간의 기준을 135도로 하면 일제 잔재가 되고, 127.5도로 하면 독립적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 시간을 ‘동경시’로 아는 것도 잘못이다. 일본의 도쿄는 東經135도가 아니라, 140도(정확히는 139도 41)에 위치한다. 15도가 1시간이니, 도쿄는 표준시에서 20분 앞서가는 시간을 쓰는 셈이다. 그리 치자면 중국의 베이징은 동경 116°지만, 120도 기준을 쓴다.

세계의 시간대는 불과 1세기 남짓 전부터 통일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른다. 그 대표적 노력은 1884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회의였다. 영국이 런던 시내 남쪽 그리니치에 천문대를 세운 것은 1675년이지만, 그곳 자오선(경도 0)을 세계표준으로 인정하게 된 것은 바로 이 회의에서였다.

원래 세계 방방곡곡의 시간은 서로 달랐다. 지역마다 해시계가 정오를 가리키는 순간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평양 125도, 서울 127도, 부산 129도 쯤 인데, 1도가 4분이니 평양-서울-부산 사이에는 각 4분과 8분의 시차가 있어야 그것이 자연시간이다. 교통과 통신이 단절돼 있던 옛날에는 당연히 자기 지방의 해시계 시간을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19세기 초 기차가 등장하자 지역마다 서로 다른 시간은 번거롭고도 위험했다. 영국에서는 1839년에 첫 열차시간표가 등장했지만, 1880년에서야 전국 단일 시간제로 통일했다. 동서가 20분 차이 정도인 영국보다 훨씬 땅이 넓은 미국에서는 19세기 중반까지 100곳이 넘는 지역의 지방시간표를 만들어 보급할 지경이었다. 워싱턴이 12시 정각일 때 각 지방은 △보스턴 12:24 △뉴욕 12:12 △워싱턴 12:00 △시카고 11:18 △세인트루이스 11:07 △새트라멘토 9:02 등이라고…….

이런 배경에서 1884년 워싱턴 회의가 열렸다. 26개 나라에서 대표 41명이 참가했는데, 유일한 동아시아 참가자는 일본 도쿄대 물리학 교수였던 기구치 다이로쿠(菊池大麓)였다. 이 회의는 그리니치 경도를 본초자오선(本初子午線)으로 정했고, 15도 마다 한 시간 차이로 기준시를 정하자 했다. 형편에 따라 시간을 꼭 1시간 차이로 하지 않고 30분 또는 심지어 15분 차이로 자기 기준시간을 정한 나라도 있지만, 거의 그 기준을 따르고 있다.

90%가 한 시간 차 시간제를 쓰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새삼 30분 차이 시간제를 채택한다는 것은 생뚱맞다. 독일과 프랑스가 같은 시간대를 쓰는 것은 물론, 유럽은 스페인에서 폴란드까지 거의 모두가 하나의 시간제를 쓴다. 자꾸만 좁아지는 오늘의 세계에서 독립정신을 지나치게 발휘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지나친 독립정신이야말로 일제가 남긴 가장 불행한 ‘식민지 잔재’이기도 하지 않은가.

박성래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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