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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正名
역사와 正名
  • 이영수 발행인
  • 승인 2015.08.07 12: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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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이영수 발행인
▲ 이영수 발행인

여름 극장가에 영화 한 편이 잔잔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때는 1933년. 항저우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만주에서 조선인 마을을 불태우고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했던 조선주둔군 사령관(카와구치 마모루)과 일제에 빌붙어 부를 구가하는 친일파 중의 친일파 강인국을 처단하기 위해 세 명의 작전요원을 경성(서울)에 파견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이 영화의 주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암살」(최동훈 감독)입니다.

영화에 문외한인지라 저는 두 가지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주인공 안옥윤과 염석진의 ‘대답’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대답’으로부터 비롯되는 어떤 ‘이름’의 문제입니다.

안옥윤은 비극적 가정사를 안고 있지만 끝까지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에 충실했던 한국독립군 제3지대 상등병으로 저격수 역할을 맡아 영화를 이끌어갑니다. 반대로 청년시절 폭탄투척과 요인 저격 등 무장 저항 운동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된 염석진은 고문 끝에 일제 밀정이 돼 풀려나 임시정부 정보 등을 팔아넘기는 일제 走狗가 되고 이윽고 해방 이후엔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게 됩니다.

두 사람은 각자에게 던져진 질문에 응답합니다. 당장 독립하는 것도 아닌데 왜 싸우냐고 묻자 안옥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라도 알려야지. 우리가 계속 싸우고 있다는 걸.”반면 왜 동지를 배신했냐고 묻는 안옥윤에 대해 염석진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합니다. “해방이 될 줄 몰랐으니까. 알았으면 이렇게 했겠냐고…….”

1919년 3·1운동을 전후로 국내외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됐지만, 상해를 거점으로 1919년 9월 개헌형식으로 통합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합니다. 1932년 4월 尹奉吉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반격, 1937년 중일전쟁의 戰火속에서는 중국 각처를 옮겨 다녀야 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치장(1939)을 거쳐 충칭(1940)에 자리 잡으면서 임시정부는 전시체제로 정비함으로써 활발한 활동을 다시 펼칩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 가장 주목할 성과로 光復軍을 창설, 태평양전쟁에 임해 대인선전포고를 발하고 연합군과 함께 중국·인도·버마 전선에 참전했던 점을 들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정부를 통로로 국제외교도 강화해 카이로선언(1943) 이후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약속도 받아낸 것도 중요한 성과입니다. 이런 가운데 建國綱領을 발표(1941)하고 헌법을 개정(1940·1944)하면서 광복한국의 새로운 통치기반을 다져나갔습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봅니다. 반민특위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염석진은 안옥윤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 자리에는 염석진이 밀정임을 알아내고 처단하려다 오히려 그에게 역습을 당해 사경을 헤맸던 임정의 요원이 함께 자리했습니다. 그들은 염석진을 향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라는 임정 김구 주석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1949년이었으니 16년 만에 작전을 종료한 셈입니다.

1910년 국권 상실에서부터 1945년 광복까지를 가리켜 우리는 ‘일제강점기’라고 교육해왔습니다. 이제 저는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되찾아야할 어떤 ‘이름’에 대해서 말입니다. 수많은 의병 운동, 그리고 임시정부의 치열한 활동, 영화 속 허구의 인물 안옥윤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싸우고 있다”라는 메시지가 말하는 것은, ‘일제강점기-해방’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對日抗爭期-光復’이라는 이름의 회복입니다. 학계 일부에서 ‘대일항쟁기’라는 용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 오히려 부끄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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