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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연구소의 허상과 실상
대학 연구소의 허상과 실상
  • 허남린 논설위원/브리티시-콜럼비아대·아시아학과
  • 승인 2015.05.18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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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허남린 논설위원/브리티시-콜럼비아대·아시아학과

대학의 연구소 하면 당연히 연구를하는 중심처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실상은 나라에 따라, 학교에 따라, 연구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필자가 다소 견문이 있는 인문학 계통에 한정해 말한다면, 사정은 더욱 그러하다. 한국의 인문학 계통의 큰 연구소 가운데는 괄목한 만한 연구성과를 산출하는 곳이 여럿 있다. 이들 연구소들은 다수의 경쟁력 있는 전문연구인력을 고용하고 있으며, 자체의 방대한 연구자료를 소장하고, 매년 공동 혹은 개인 연구프로젝트를 수행해 방대한 연구성과를 산출한다. 이들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경쟁력이 있는 연구소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비해 북미의 인문학계통 연구소들은 연구성과의 산출과는 거리가 멀다. 눈길을 끄는 이름을 내걸고 무슨 거창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치장하고 있지만, 그 실상은 직접적인 연구 수행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대부분은 전문 연구인력을 갖고 있지도 않고, 자체의 연구자료를 소장하고 있지도 않으며, 연구소 이름으로 연구성과를 출판하는 것도 아니다. 연구소의 출판프로그램, 저널의 발행 등은 연구소 자체의 연구성과물도 아니고, 연구소의 구성원에 한정되지도 않는다. 연구소는 연구의 주체가 아니라, 연구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거나 교류의 장소를 제공하는데 불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체의 재원이 있는 연구소들은 ‘박사후 연구원’을 몇 명 모집해 이들에게 1년 정도 생활비를 제공하고 학교의 시설물을 이용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그 정도의 여력이 있는 연구소는 아주 소수에 속한다. 박사후 연구원들은 때로는 한 과목 정도를 가르치는 임무를 지기도 하는데, 이는 학교의 교육비용 절감의 속내와 맞닿아 있다. 박사후 연구원 이외에 무슨 정식 교수와 같은 연구자를 안정적으로 고용하는 연구소는 거의 전무하다. 북미에 산재하는 한국학연구소 혹은 아시아연구소 등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북미의 인문학 계통 연구소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첫째는 정기적 혹은 비정기적으로 외부 연구자를 초청해 공개 특강을 실시한다. 이 경우 한 시간 반 혹은 두 시간에 걸쳐 자기가 하고 있는 연구에 대해 강연을 하고, 이어지는 질의에 응답하고, 그 후 저녁을 같이 먹고 헤어지면 그것으로 임무가 종료된다.

두 번째 기능은 여력에 따라 연구소와 관련이 있는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소액의 연구비 지원을 하고, 영화상영, 공연초청 등 여러 행사를 개최하고 이를 잘 포장해 이미지 홍보를 열심히 한다. 세 번째는 방문학자들을 받아들이고, 가끔은 학술모임 등의 학문교류를 주선하기도 한다. 최근의 두드러진 경향으로는 방문학자들에게 명목을 붙여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을 징수하는 곳도 많아졌다.

수업과 연구의 주체인 교수들을 채용하고 신분을 보장해 주는 기관은 연구소가 아니라 개별 학과다. 대학원생을 모집하고 학위를 수여하는 곳도 연구소가 아니라 개별 학과다. 즉 학교의 정규예산으로 운영되는 학문조직은 연구소가 아니라 개별 학과인 것이다. 연구소는 각기 다른 학과에 속한 교수들이 교류를 나누는 곳이지, 집단적으로 혹은 이니셔티브를 갖고 무슨 연구성과를 산출하는 주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매력 있는 이름을 걸고 있는 연구소가 무슨 거창한 연구를 수행하는 생산주체인 것처럼 생각하기 십상인 것은 한국의 경우를 이에 대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연구교류협정, 연구지원 등 허상을 실상화해 범하는 오류도 많다. 남들도 우리와 같다는 몰이해의 함정이 여기에 있다.

허남린 논설위원/브리티시-콜럼비아대·아시아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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